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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도자기 24번쩨 청 건륭어제/백지법랑채화훼문포복형

by -한우물 2021. 10. 21.

북경 고궁 박물원에 아래의 도자기와 너무 유사하여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바탕 색상과 일부 도안만 틀리어서 언듯 본다면 잘 모를 정도여서 한번 올려본다.   도자기 두 개를 비교하면 전혀 다르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개별로 본다면 너무 비슷한 이미지가 강하게 느끼는 것은 도자기의 목도리를 두른듯한 리본이 강하게 다가와 시각적으로 그리 느끼는 것은 아닌지 생각하게 한다.  시간이 허락하면 고궁박물원 도자기와 비교하여 올려볼 기회가 주어지길 ..... 

청 건륭 어제/백지 법랑채 화훼 문 포복형

건륭제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 옮겨온 글 )

건륭제
乾隆帝재위즉위식전임후임휘별호묘호시호출생일출생지사망일사망지매장지부친모친배우자

 
지위


청 제국 제6대 황제
몽골 카안
1735년 10월 18일 ~ 1796년 2월 9일
옹정 13년 9월 3일
(1735년 10월 18일)
옹정제
가경제
이름
아이신 교로 훙리
십전노인(十全老人)
고종(高宗)
법천융운지성선각체원입극수문분무흠명
효자신성순황제
(法天隆運至誠先覺體元立極敷文奮武欽明
孝慈神聖純皇帝)
신상정보
강희 50년 8월 13일
(1711년 9월 25일)
청나라 북경 옹친왕부
가경 4년 1월 3일
(1799년 2월 7일)
청나라 북경 자금성 양심전
유릉(裕陵)
옹정제
효성헌황후
효현순황후
계황후
효의순황후

 

보 친왕 시절의 건륭제

건륭제(乾隆帝, 강희 50년 8월 13일(1711년 9월 25일) ~ 가경 4년 1월 3일(1799년 2월 7일))는 청나라의 제6대 황제(재위 1735년 ~ 1796년[1])이다. 청 제국 산해관 넘은 뒤 자금성에서 청나라의 군주가 천명을 상실한 명나라의 주씨를 대신하여 중국의 새로운 수명천자(受命天子)가 되었음을 선언한 이래 네 번째의 황제이기도 하다.   아이신 교로 훙리(만주어ᡝᠠᡳᠰᡳᠨ
ᡤᡳᠣᡵᠣ
ᡥᡠᠩ
ᠯᡳ
 Aisin Gioro Hung li, 한국 한자: 愛新覺羅弘曆 애신각라 홍력), 묘호 고종(高宗, 만주어: ᡬᠠᠣᡯᡠᠩ G'aodzung), 시호 법천 융 운지 성선각체 원입 극부문분 무흠명 효자 신성순 황제(法天隆運至誠先覺體元立極敷文奮武欽明孝慈神聖純皇帝), 짧은 시호로는 순황제(純皇帝, 만주어: ᠶᠣᠩᡴᡳᠶᠠᡥᠠ
ᡥᡡᠸᠠᠩᡩ
 Yongkiyaha Hūwangdi)이며, 연호 건륭(乾隆, ᠠᠪᡴᠠᡳ
ᠸᡝᡥᡳᠶᡝᡥᡝ
 Abkai Wehiyehe, ᠲᠩᠷᠢ ᠶ᠋ᠢᠨ
ᠲᠡᠳᠭᠦᠭ᠍ᠰᠡᠨ
 Tengri-yin Tedqügsen)이다. 제4대 황제 강희제의 손자이자 제5대 황제인 옹정제의 넷째 아들이며 [2], 옹정제의 후궁 출신인 효 성헌 황후 뇨후루씨(孝聖憲皇后 鈕祜祿氏)의 소생이다.

어릴 때부터 제왕이 지녀야 할 자질이 보여 할아버지 강희제와 아버지 옹정제에게 인정을 받았다. 1735년(옹정 13년), 옹정제가 급사하자 저 위비 건 법에 따라 황위에 올라 먼저 만주족 한족 대신들의 갈등을 조정하며 내치를 다진 후 대규모 정복 사업과 문화 사업을 펼쳤다. 문화 사업으로는 옹정제 때 마카오로 추방된 로마가톨릭교회 산하 예수회 선교사들을 다시 불러들여 북경 서양식 건물을 짓도록 허락한 것과 특히 예수회 수도사인 주세페 카스틸리오네에게 서양식 궁전인 원명원을 개·보수를 감독하게 한 것이 있다. 그 자신 역시 문화와 예술에 관심이 많아 시와 서화를 즐겼고 각지의 시인과 화가들을 독려하였다. 특히 10년의 세월을 들여 고금의 도서를 수집하여 중국 역사상 최대의 대편찬 사업인 《사고전서》를 편찬함으로써 고서적들을 많이 발굴케 하였으나 문자의 옥도 단행하여 청 제국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책들은 모두 금서로 만들었다.

또한, 10차례에 걸친 정복 사업을 펼쳐 중가르 위구르를 복속시키고 티베트, 미얀마, 베트남, 네팔까지 진출하는 등 현재 중국 영토의 틀을 만들었다. 그러나 집권 후반기에 들어서면서 시대착오적인 정책을 내놓고 여기에 사치, 반란, 서방과의 부실한 외교, 그리고 희대의 탐관오리로 평가받는 뇨후루 허션을 20여 년간 총애하여 말년엔 매관매직과 부정부패가 빈번히 일어나고 국고가 비어 결국 청 제국은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1796년(건륭 60년) 말, 자신은 감히 할아버지인 강희제의 재위 기간을 넘을 수 없다며 재위 60년째에 태상황제로 물러났지만, 막후에서 정책 최고 결정권을 행사하여 여전히 실권을 쥐고 있었다. 재위기간 60년에 태상황제로서 실권을 장악한 4년까지 합치면 건륭제는 중국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실권을 장악한 황제였다. 스스로 십전노인(十全老人, 열 번의 원정을 모두 승리로 이끈 노인)이라 칭하고 그렇게 불리기를 좋아하였으며, 중국 최후의 태평성세 강건성세(康乾盛世)의 마지막을 장식한 황제이다. 중국의 역대 황제 중 가장 장수한 황제이며 중국 최후의 태상황제로 그의 생모와 신분, 즉 한족의 피가 흐르는지에 대한 의문이 있어서 중국의 역대 황제 중 가장 민간의 전설이 많은 황제이기도 하다.

 

도자기에 빨간 목도리 두르듯 

빨간 리본이 그려진 도자기는 처음 본다

어제는 일반적으로 황실자기라고도 부른다.

황제의 것을 의미하는 어제(御製) 관지가 밑 굽에 표시되어 있다.

어(御)는 ‘황제의 것

천자의 것을 뜻한다고 하여 

지금은 쉽게 말로 표현하는 것이 황실자기라고

표현한다고 생각한다. 

도자기를 볼수록 화려하게 표현하였고

유약 발림도 좋다고 표현한다.

청화백자에 법랑체 화훼 문이 잘 그려져

황실 자기의 품격을 갖추었으리라   3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