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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원신문기사내용

각설이와 엿장수

by -한우물 2008. 12. 20.
 
 
각설이와 엿장수
가을이면 경로잔치가 곳곳에서 열린다. 지방자치단체의 축제도 많은데, 행사장을 둘러보면 심심치 않게 엿장수공연팀을 만날 수 있다. 개업행사에도 각설이는 빠지지 않는다.
행사장에 가보면 누더기 각설이 복장을 하고서 음악에 맞추어서 흥겨운 가락으로 춤을 추어가며 모판에 엿을 자르며 판매를 한다. 엿장수공연팀이라 불리면서 행사장에서 손님을 끌어 모으기 위해서 북이나 장구를 치면서 불쑈를 보여주며 만담 같은 입담으로 구경하는 사람들의 웃음을 선사하는 것이다.
앞에는 양은그릇을 하나 덜렁 달고, 또 한쪽은 검정 고무신을 달고서 노래 가락에 맞추어 춤출 때면 고무신과 양은그릇도 덩달아 덜렁덜렁 거리면서 손님들의 흥을 마음껏 돋우고 나면 여기저기서 엿을 사주면서 즐긴다. 어르신들은 엿장수들과 어우러져 덩실덩실 춤을 추시면서 한마음이 되기도 한다.
지금의 엿장수공연팀은 행사장에서 엿을 파는 일은 부업이고, 공연비를 따로 받고 초대되어 연예인 못지않게 각종 행사장에서 분위기를 잡는다. 예전에 엿장수하고는 너무나 다르다.
‘엿장수 마음대로!’란 말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많이 들었다. 엿장수의 가위 놀림대로, 자기 마음대로 이랬다저랬다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었다.
어렵던 시절에는 리어카도 귀했기에 광목으로 엿판에 묶어서 어깨에 걸치고서 가위질을 하면서 골목골목을 누볐다. 멀리서 가위질 소리가 들리면 엿장수 아저씨가 동네에 왔다는 소리기에 떨어진 고무신, 유리병, 쇠토막 등 집안에서 쓰지 않는 고물들을 가져다가 엿장수아저씨에게로 달려갔다. 그 한 가락의 엿을 얼마나 맛있게 먹었는지 모른다. 집안에 돈은 없었기에 못 쓰는 고물들을 가져다가 군것질 거리로 엿을 먹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기도 했다. 그래서 엿이 먹고 싶으면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깨진 병까지 주워 모았다. 그때는 모든 물자가 귀해서 아껴 쓰고, 고쳐 써야 했다. 그러니 엿장수는 지금의 친환경 자원재생업이었다.
청소년기에는 엿치기를 했다. 반 토막을 내서 구멍이 큰 사람이 이기는데 진 사람이 그 엿 값을 모두 내는 놀이다. 밀가루를 뿌려 놓은 흰 엿판에 손가락만한 두께의 엿이 가지런히 있으면 그 중에서 잘 빠진 놈으로 고른다. 엿가락을 뚝 분지르고 구멍이 크게 뚫려 있을 것 같은 쪽을 재빨리 있는 힘을 다해 훅! 하고 불어 상대보다 조금이라도 더 크게 벌리려고 했던 기억이 난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미 구멍은 만들어져 더 늘어날 것도 아닌데 이기고자 하는 욕심이었다. 그래도 열심히 불어서 친구에게 엿 값을 물리는 재미는 큰 행복이었다.  그 때의 엿장수아저씨는 지금처럼 각설이 복장의 놀이꾼이 아니라 일반 복장으로 가위질을 하면서 고물을 가져다가 생계를 꾸려가는 하나의 직업이었다.
그 예전 시절의 그리움이 묻어나지만 같은 하늘 아래 자식 사는 세상 다르고 부모 사는 세상이 다른가 보다. 

노원신문 4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