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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는 나의 일상

고향의 역사 (둔내면 전리의 전래명,문화등)| 현천초등학교_자료실(퍼온글입니다)

by -한우물 2018. 9. 22.

고향의 역사 (둔내면 전리의 전래명,문화등)| 현천초등학교_자료실

가무네 | 조회 188 |추천 0 | 2001.11.26. 11:37

□ 둔내면 역사
1. 현천리(玄川里)

1) 현천리의 자연환경
현천리는 둔내면사무소를 기준으로 하여 서남쪽에 위치하고, 1,354.4㏊를 차지하고 있는 리로서,
동쪽으로는 우용리, 동남쪽으로는 조항리, 서북쪽은 궁종리, 북쪽은 갑천면 상대리,
동북쪽은 둔방내리와 경계를 하고 있다. 현천리는 산이 많아 넓은 들은 형성되지 않았으나
비교적 산들이 낮기 때문에 산과 산 사이에 크고 작은 경지가 형성되어 일찍부터 많은 사람들이
거주하였다. 그러기 때문에 조선후기(1759) 각 리가 기록된 사서(史書)의 둔내면 기록에는
현천리가 가장 인구가 많은 리로 기록되었고, 1910년경에 둔내면사무소를 설치할 때는 현천리에
면사무소가 설치되었다. 1759년도 자료에는 둔내면 10개리 중에서 현천리가 102호에 222명의
인구가 거주하여 제일 많은 호구(戶口)였고, 조항리가 22호 59명의인구가 거주하여 제일 호구가
적은 마을이었다.
나지막한 산과 구릉으로 주로 이루어져 있는 현천리는 논농사와 밭농사가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예전에는 밭농사로서 감자, 옥수수 등이 많이 생산되었으나, 세월이 지남에 따라
상품 으로서 가치가 있는 농산물들을 선별하여 집중적으로 생산하는 경향이 짙어져 가고 있다.
산에는 둔내면의 다른 지역처럼 거의 소나무 일색이었으나, 1990년대 초에 있었던 극심한
솔잎혹파리 피해로 자연환경이 많이 훼손되었다. 현천리 서남쪽에 있는 덕고산(705m)은 현천리에서
가장 높은 산이며, 덕고산에는 늘 맑은 바람이 불어 덕고청풍이란 이름이 붙어있다.

2) 현천리의 형성과 변천
현천리는 일명 '가무내'라고도 하는데 그 이유는 비가 자주 오지 않으면 강물이 잘 마른다는 뜻에서
유래한다. 또한 현천리라고 하는 것은 강의 모양이 검을 현(玄)자 모양으로 여러 굽이로 꺾여
흐른다는 이유에서 유래한다고도 전해진다. 현천리에 언제부터 사람이 거주하였는지 확실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현천교가 있는 주천강 유역에서 주먹도끼, 부러진 석기 등 구석기시대의 유물이
발견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주천강 유역에 있는 현천리는 이미 구석기시대부터 인류가 존재하였을
것이다. 현재 현천리를 구성한 최초의 씨족들이 어떤 씨족이었는지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으나
어느 씨족이 이미 수천년 전부터 생활하였음이 틀림없다.
1759년 이전부터 현천리라는 명칭이 전해오고 있고 1759년 당시 102호에 남자 110명,
여자 112명이 거주하는 둔내면에서 가장 큰 마을이었으며, 1912년 지방행정구역을 개편할 때는
윗가무내와 아랫가무내에 선락동, 간궁종, 황달모루, 자작정들을 합하여 현천리라고 하였고
이곳에 면사무소를 설치하였다.
6.25전쟁 당시 여름에는 별로 피해가 없었으나, 1.4후퇴 때인 겨울에는 현천초등학교 건물과
마을의 가옥들이 비행기 폭격으로 불타버리는 아픔이 있었다. 그리고 최근에 들어 또한 가슴아픈
일은 1990년대에 들어 윗가무내 일대가 강원도종축장예정지로 지정되면서 이곳의 주민들이 다른
곳으로 이주해 가서 수백년 동안 사람이 살아오던 이곳 마을이 없어져 버렸다는 사실이다.
1995년 현재 현천1, 2, 3, 4리로 분리되어 총 167호에 567명의 인구가 거주하고 있다.
현천1리는 72호에 남자 150명, 여자 122명 총 272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2리에는 31호에
남자 52명, 여자 45명 총 97명, 3리에는 10호에 남자 24명, 여자 18명 총 42명, 4리에는 54호에
남자 81명, 여자 75명 총 156명이 거주하는 둔내면에서 큰 마을이다.




3) 현천리의 이모저모
현천리는 일제치하 둔내면의 주요 행정기관인 면사무소 및 주재소(파출소)가 위치한 둔내면의
중심지였다. 당시 현천리에는 종대거리라는 곳이 있었는데, (현 현천2리 2반)이 종대거리는 일제치하
주민들을 강제동원하기 위해 동네 한복판인 삼거리에 무쇠로 만든 종을 달아 두었다고 하는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현천리에는 범바위(호암동)라는 곳이 있는데, (현 현천2리 4반) 현천리와 조항1리를 연결하는
강길옆인 이곳에 큰 바위가 있었는데, 그 바위에 호랑이가 해만 지면 나와 앉았기 때문에 행인들이
다니지를 못하였다고 하며 호랑이가 앉아 있던 바위라서 범바위라고 불렸다고 한다.
또 그 맞은편에는 배바위라는 바위가 있는데, 범바위와 마주 보면서 웅장한 기세로 서 있다.
1970년대까지는 약 15호 정도가 이곳에 거주하였으나 1970년 이후부터 인명피해, 가축피해가
자주 발생하여 주민 대부분이 이주하여 현재는 2∼3가구 정도가 살고 있을 뿐이다.
현천리에는 마납자리(현 현천2리 3반)하는 곳이 있는데, 예전부터 현천리에는 논이 많았기 때문에
소나 말을 이용한 논갈이가 많았다고 한다. 그런데 모내기를 하기 위해 논갈이를 하던 중 말이
수렁에 빠져 나오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익사를 하였다. 그 후 그곳을 말이 죽은 곳이라 하여
마납자리라고 불렀다고 한다.
현천4리 자작정에는 열녀각이 있었다고 하는데, 성씨는 신안주씨로 남편이 지병으로 자리에 눕자
수년간 간호하였는데, 남편이 죽은 뒤에도 묘소에서 3년간 시묘살이를 하였다.
이에 열녀각을 세웠는데, 영동고속도로 건설시 철거되었다고 한다.
1950년경 현천리에는 남헌 전경석(南軒 田璟錫)선생이 한학을 가르쳤는데, 그 제자로는
안병화, 김광근, 안영환 등이 있다. 현천리에는 대통령 선거인단대의원을 역임한 권봉주,
스피드 스케이팅 국가대표선수였으며, 현재 국가대표 코치인 김관규, 고등학교 교감을 역임한 김광근,
태백시 파출소장인 김용근, 둔내면 부면장을 역임한 김익래, 둔내면 번영회장을 역임한 박순갑,
둔내면장을 역임한 안달선,둔내면 부면장과 둔내농협장을 역임한 안병권, 둔내농협장을 7,8,9,10대
역임한 안병성, 청일면 면장을 역임한 안병화, 태장1동장을 역임한 안윤승, 초등학교 교장을 역임한
윤희수, 공군대령인 이승희, 둔내면장을 역임한 조석호 등 많은 인재가 배출되었다.

4) 현천리의 지명
◎ 가매봉 : 가마처럼 생긴 산.
◎ 가무내(玄川) : 조금만 가뭄이 들면 내가 말라 버린다하여 가무내라 한다고 전해짐.
◎ 간궁종(間弓宗) : 윗가무내 북쪽에 있는 마을로 궁종리로 가는 중간에 있는 마을.
◎ 거리말 : 횡성으로 나아가는 큰 길이 있는 마을이므로 거리마을이라고 한다.
◎ 거북돌배기 : 거북형상의 바위가 있어서 유래되었다고 함.
◎ 꺽지바위 : 바일과 현천리사이에 흐르는 강가에 있는 바위로 모양이 꺽지의 모습과 비슷해서
붙여졌다.또 꺽지가 이곳에 많아서 그렇게 부름.
◎ 당골 : 주막거리와 현천 사이의 마을로 산제당이 있었다.
◎ 동백이재 : 황우촌에서 안말로 넘어가는 고개.
◎ 바일고개 : 안말에서 바일로 내겨가는 고개로 바일을 한눈에볼 수 있는 경치좋은 곳임.
바일사람들은 이곳을 웃다리목새라고 부름.
◎ 범바위 : 범바우 또는 호암동(虎岩洞)이라고도 하며 현천리 동남쪽에 있는 마을.
호랑이가 새끼를 친 바위가 있음.
◎ 범바위고개 : 범바위 남서쪽에서 안흥면쪽으로 가는 고개.
◎ 병풍바위 : 안말에서 바일고개를 넘어 개울다리를 건너가기 전에 있는 절벽으로 그 절벽이 흡사
병풍을 쳐 놓은 것과 비슷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

◎ 부채골 : 주막거리뒤에 있는 골짜기와 그 근처에 있는 마을.
◎ 뺄골저수지 : 윗가무내에서 현천초등학교로 넘어가는 고개로 시뻘건 황토흙이 많음.
겨울에는 바람이 많이 불고 눈이 많이 쌓이는 곳으로도 유명함.
◎ 뻘골 : 흑다리골과 활마루 사이에 있는 골짜기.
◎ 삼형제고개 : 부채골쪽에서 황우촌 성황당쪽으로 내려가는 긴고개.
삼형제가 이 길을 걸어가다가 모두 얼어 죽었다고 하는 슬픈 사연이 깃든 곳.
◎ 새소골 : 황우촌(黃牛村)과 둔방내리(屯坊內里) 사이에 있는 골짜기.
◎ 선락동(仙樂洞) : 가매봉과 활마루 사이에 있는 마을, 신선이 놀았다 함.
◎ 소쿠니재 : 황우촌에서 바일의 용수목쪽으로 가는 것에 있는 고개로 작지만 오르기 힘든
골짜기길이며 겨울에는 다니기가 힘든 길임.
◎ 아랫가무내 : 하현(下玄) 또는 하현천이라고도 하며 가무내 아래의 마을.
◎ 안말 : 거릿말 안쪽에 있는 마을로 예전에는 지서가 이곳에있었다고 함.
◎ 앞재 : 바일에서 앞개울을 건너 아랫가무내로 가는 길로서 바일고개(웃다리목새)길이 나기 전까지는
주요한 산길이었음.
◎ 양지말 : 현천초등학교에서 자작정 가는 중간에 있는 양지바른 마을.
◎ 연수터 : 범바우 남쪽에 있으며, 절이 있었고 연수라는 중이 살았다 함.
◎ 웃거리 : 상거리라고도 하며 상현천과 자작정 사이에 있는 마을.
◎ 웅골 : 안말 남쪽에 있는 골짜기.
◎ 윗가무내 : 상현 또는 상현천이라고도 하며, 가무내 위쪽에 있는 마을.
◎ 음지말 : 현천초등학교에서 자작정 가는 중간에 있는 마을.
◎ 자작정 : 가무내 서쪽에 있는 마을로 현천리 서쪽 입구에 해당하는 곳에 있다.
◎ 재마당고개 : 일제때 종대가 있었음.
◎ 주막거리 : 거릿말과 부채골 사이에 있는 마을로 주막이 있었다.
◎ 주머니골 : 범바위 뒤에 있는 골짜기.
◎ 천렵바위 : 안말과 바일 사이 개울에 있는 바위로 넓어서 천렵을 많이 함.
◎ 혹다리골 : 웃거리 위쪽에 있는 마을.
◎ 활마루 : 간궁종 북쪽 안흥면과 경계에 있는 마을.
◎ 황달모루 : 황우촌(黃牛村)이라고도 하며 현천리 동쪽에 있는 마을로 황우도강(黃牛渡江)의
명당이 있다.



2. 둔방내리(屯坊內里)

1) 둔방내리의 자연환경 둔내목차 둔방내목차
둔방내리는 동쪽으로 주천강(酒泉江)을 경계로 하고 서쪽으로는 호두봉(626m)과 그 서쪽의
신선봉(622m)을 경계로 갑천면 상대리와 경계를 하고 있으며 북으로는 마암리, 남으로는 현천리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주천강을 사이에 두고 그 남쪽으로 우뚝 솟은 쇠스랑봉(620)은 자포리의
안산(남쪽에 있어 그 마을을 수호하는산일 뿐만 아니라 둔방내리의 안산이며 동쪽으로 유유히
흘러가는 주천강은 둔방내리의 젖줄이다. 주천강 서북쪽에 현성된 넓은들이 둔방내리의 중심부를
형성하고 있다. 둔방내리 안창말 뒷 언덕에서 석양의 경치는 참으로 아름답다.
그래서 둔방내리를 사랑하는 시인, 묵객들이 둔방내리의 석양의 풍경을 "우곡낙조(牛谷落照)"라는
제목으로 칠언절구의 한시를 남겼다.

2) 둔방내리의 형성과 변천
둔방내리의 중심부라고 할 수 있는 둔내중·고등학교를 중심으로한 인근에는 이미 2,000여년전부터
우리의 조상들이 농사를 지으며 생활하였던 집터와 씨앗이 발견되었고 그 시대에 우리의 조상들이
생활하면서 사용하였던 토기, 석기, 장신구 등 수많은 유물들이 발견된 곳이다.
따라서 둔내면에서 둔방내리에는 적어도 2,000여년 이전부터 인류가 생활하였던 유서깊은 곳
이라고 하겠다. 둔방내리는 이 지역 안에 있던 둔창(屯倉)에서 그 명칭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창말은 창촌(槍村),또는 창촌(倉村)이라고도 하였는데, 이곳에는 둔전(屯田)이 있었고 이 둔전에서
산출된 양곡을 저장해 두는 창고가 있었다. 둔전이란 원래 군사들이 주둔하는 곳에 설치하는
곳이었으므로 둔친 둔(屯)자를 써서 둔방내라 하였다. 둔방내리는 조선시대 도청리(都廳里)라고
하였는데, 1914년경 창말, 넘은골, 샘골, 새터 등을 합하여 둔방내리(屯坊內里)라 하였고, 1, 2리로
나누어져 있다. 둔방내리에 제일 먼저 터를 잡고 살았던 씨족이 어느 씨족인지 지금으로서는 전혀
알 수 없으나 아무튼 이미 씨족 사회시대부터 인류가 존재하였음은 틀림없고, 현재 고증할 수 있는
씨족은 둔방내리에서 12대를 살았고 그 종손이라는 청주 한씨 한상국씨 가문이 가장 오래
거주하였다. 영조시대인 1759년 ≪여지도서(與地圖書)≫에 보며, 당시 둔내면은 화동리(禾洞里)
마여미리(馬余味里),석문리(石門里),자포곡리(自浦谷里),군이곡리(軍伊谷里)우용리(右容里)
·조항리(鳥項里)·영랑리(永浪里)·도청리(都廳里)·현천리(玄川里) 등 10개리로 되어 있고
둔방내리(屯坊內里)는 보이지 않는다. 둔내면에서 둔방내리가 기록에 나타나는 것은 1871년에
발간된 ≪관동읍지(關東邑誌)≫가 처음이다. 그러나 둔방내리는 새로 구성된 마을이 아니라 이미
이전부터 도청리(都廳里)라고 불렸는데, 이때 그 명칭이 변경된 것이다. 도청리시대에는 90여호
195명이 거주하는 큰 마을이었으며 1995년 현재에는 193세대 537명의 인구가 거주하는 더욱 큰
마을이 되었다. 현재 진행중인 문화마을 조성사업이 완료되면 둔방내리는 산간벽지의 마을이 아니라
준도시에 해당하는 곳이 될 것이다.

3) 둔방내리의 이모저모
둔방내리에는 둔내중,고등학교를 비롯하여 둔내천주교회, 둔내감리 교회등 교육기관과 종교기관이
많다. 지금의 둔내중고등학교가 있는 곳은 원래 비옥한 논이었는데, 1952년 둔내면 독지가
이응율(李應律)씨가 학교부지로 희사하였다. 6.25동란 후 교사가 없어 여름에는 강변의 나무
아래나 잠실창고 같은 곳에서 수업을 하였고, 겨울에는 천막을 치고 공부하던 학생들
(당시는 둔내고등공민학교였음) 교실이 당장 급하였는데 교지는 있었으나 건축비가 없어 교사를
짓지 못하였다. 1952년 교지에 학생들을 동원하여 농사를 지었고, 다음해인 1953년
(당시 안흥중학교 둔내분교였음)에 학생들이 동원되어 강가에서 자갈을 지게로 나르고 목재를
운반하는등 교직원과 학생들이 동원되어 가교사를 건축하고 1953년말부터 여기서 공부를 하게
되었다.
1954년도에는 안흥중학교 둔내분교졸업생을 배출하였고, 1955년도 둔내중학교 제1회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43년이 지난 현재는 둔내중고등학교로서 둔내지방의 인재 양성의 요람이 되고 있다.
1917년 둔내감리교회가 둔방내리에 설치되어 둔내 기독교의 요란지가 되었으며, 천주교도 1956년에
둔방내리에 들어 왔다. 또한 둔방내리 비석거리에는 조선시대 이곳을 순행하였던 지방관을 비롯한
둔내면을 위해 열심히 일한 면장님들의 공덕비가 세워져 있다. 그리고 일설에는 우리나라를
일본에게 넘긴 장본인이라고 하여 매국노로 비난을 받은 이완용(李完用)의 철비(鐵碑)가 있었다고
하나 이것은 풍문일 뿐 사실을 확인할 수 없다. 둔방내리에는 절터골과 약물탕에 관한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옛날 절터골에는 작은절이 있었는데, 스님이 어느날 외출하였다가 절에 돌아와보니
절안에 없었던 기둥이 서있었다. 이를 이상히 여긴 스님이 그 기둥을 얼싸안았는데 그 기둥은
빈대로 만들어진 기둥이었다. 빈대로 만들어진 기둥이 무너지며 그대로 스님을 덮쳐버렸다.
기둥을 이루고 있던 빈대들은 스님을 먹어버렸고 관리할 사람이 없어진 절은 폐허가 되어
없어졌다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또 절터에서 북동쪽으로 가면 절벽 사이에 약물탕이
있는데 예전에는 약효가 좋아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다고 한다. 그러나 부정한 사람들이 오면
약물탕 위 절벽에 호랑이가 나타나거나 큰구렁이가 나타나 약수를 못마시게 하였다고 한다.
창마을 북쪽 1㎞ 지점에 있는 박재선선생님이 1940년대에 서당을 설치하여 10여년동안 아동을
교육하였고, 창말 서쪽 500m 지점에 한영수선생이 역시 1940년대에 서당을 설치하여 10여년간
아동을 교육하였다. 이 서당에서 공부한 사람 들로는 조원덕, 정기영, 이병두, 김영화, 박귀덕,
박분식, 박순만, 조원복, 조순행, 박순택, 송기호, 안광수, 김재혁, 박종은, 최진복, 최진남, 박병석,
신중환, 김창하, 한동섭 등 많은 사람이 있다. 둔방내리에는 많은 인물이 배출되었다.
서예가인 김경완, 시인이며 국가재건위원회 횡성군 위원장인 김경항, 육군소령을 역임한 김종섭,
원주 반곡역장을 역임한 김태식, 둔내면 부면장을 역임한 김호남, 둔내면장과 초대 강원도의회 의원
을 역임한 박경표, 육군소령을 역임한 방응진, 대학교수인 서광하, 자원지도자 횡성군 연합회회장을
역임한 윤종배, 제3대 둔내농협 조합장을 역암한 원종대, 육군소령인 원종찬, 재경둔내면민회
부회장이며 대흥그라비아사 대표인 이종식, 육군소령인 정태복, 육중령인 하상덕, 둔내우체국장에서
40년을 근속한 한백수, 평통자문위원과 1.2대 횡성군의회 의원을 역임한 한상훈, 바르게 살기운동
둔내면협의회 회장 한상국, 청일면 부면장과 둔내면 부면장을 역임한 한상남 등이 있다.

또한 안창말 입구에는 최봉문, 박종은 등이 제사를 주관하던 성황당이 있었는데 1995년 문화마을
조성사업으로 폐지되었다. 제사주관은 동내 구장(리장)이나 유사가 하였는데, 제일을 택하여
마을사람들의 안녕과 마을의 번영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냈다. 제일에는 성황당에 제수를 차려놓고
자정이 넘어서 제사를 지내고 제주는 소지를 올렸다.

4) 둔방내리의 지명
◎ 건너말 : 샘골 개울 건너에 있는 마을.
◎ 검두재 : 둔방내리에서 금대리로 넘어가는 고개.
◎ 꼬부랑재 : 둔방내리에서 금대리로 넘어가는 재.
◎ 넘은골<안샘골> : 샘골 너머 안 골짜기에 있는 마을로 둔방내리의 맨끝 마을 현천리와
갑천면계와 연접해 있다.

◎ 당골 : 서낭당이 있었던 마을. '당'이란 예전에 제당, 신당, 사당, 불
당, 영 당, 서당, 서낭당<城隍堂>등을 지칭하던 말이다. '당
골'이란 당이 있는 골짜기라는 말
◎ 둔방내 : 둔창이 있던 마을이라고 하여 둔방내라는 이름이 붙었으며 둔방내리라고도 함.

◎ 문둥바위 : 넘은골 중앙에 자리하고 있는 지름5m 정도의 웅장하고
편편한 바위가 있는데 서당 학동들이 많이 놀던 곳이라하여 문동(文童)바위라 하였으나
지금은 문둥바위라 부름.
◎ 방아재 : 둔방내1리 3반에서 석문리로 넘어가는 길목이며 지금은 사라지고 없지만 곡식을 찧을 수
있는 방아들이 있었던 지역이다.
◎ 비석거리 : 삼거리 서남쪽에 있는 마을. 선정비들을 한 데 모아 세웠음.
◎ 사양동(士養洞) : 선비들을 길러내는 마을이라고 하여 사양동이라고 하였으며, 옛날에는
서당(書堂)이 있었음. 샘골이라 고도 함.
◎ 삼거리 : 횡성, 강릉, 자포리로 가는 세 갈래 길로 된 마을,
◎ 새터 : 샘골 아래의 마을. 6번 국도변에 위치한 곳으로 둔방내리 서쪽입구이며 수도작으로서는
둔내에서 제일 넓은 새터뜰이 있는 곳이다.
◎ 샘골<생골, 천동> : 창말 남서쪽 즉 새터와 넘은골 사이에 있는 마을.
좋은 샘이 있다하여 용천동, 샘골, 천동(泉洞)이라 하였고 또한 조선조 말엽에는
진사가 여럿 배출됐다 하여 사양동(士養洞)이라 하기도 하였다.
◎ 속골 : 새터 서쪽 속 골짜기에 있는 마을.
◎ 송정(松亭) : 노송이 많은 마을.
◎ 안말 : 넘은골의 다른 마을.
◎ 안샘골 : 넘은골의 다른 이름.
◎ 안창말 : 창말 안쪽에 있는 마을.
◎ 약수바위 : 정터 뒤에 있는 너비5m 정도의 바위이며 이 바위에서 샘물이 솟아난다.
◎ 절터골 : 사양동내에 있으며 절터가 있는 마을. 둔방내리에서 마암리로 연결되는 주위에 산악경관이
좋은 곳에 옛절터가 있어 절터골이라고 하였고 지금은 바위틈새에서 샘물이 나와 약수로
이용되고 있다. 둔방내 1리 6반이며, 주위에 아름드리 나무 15그루가 있다.
◎ 창말 : 둔방내리에서 제일 큰 마을. 조선시대 둔창이 있었다는 데서 유래함.
◎ 철비석 : 내창촌에 이완용의 철비석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졌다고 한다.


3. 영랑리(永浪里)

1) 영랑리의 자연환경
영랑리는 둔내면사무소를 기준으로 하여 가장 남서쪽에 위치한 리로서 둔내면 12개리 중의 하나이다.
남쪽은 안흥면 성산리, 서쪽은 안흥면 소사리, 서북쪽은 현천리, 남동쪽은 평창군 방림면 계촌리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또한 동쪽에는 토봉산(兎峯山)이 수려하게 솟아 있는 아담한 마을이다.
이 영랑리를 관유하는 주천강은 구비치며 흐르다가 안흥면 성산리로 흐르는데 주천강 좌우에 크고
작은 들이 형성되어 일찍부터 농경문화를 형성하였고 이 주천강 유역에서 구석기시대의 유물이
발견되어 이미 구석기시대부터 우리의 인류가 이 강을 따라 왕래하면서 고기를 잡아먹고 산에서
짐승을 잡아먹으면서 생활하였음을 알 수 있다.

2) 영랑리의 형성과 변천
영랑리를 한때 영호리(永湖里)라고 불렀다. 이 마을 앞을 굽이쳐 흐르는 주천강이 길고 맑게
흐른다고 하여 영호리라 하였고 같은 의미로 영랑리라 부르게 되었다. 영랑리에 사람이 살게 된것도
꽤 오래전의 일로 주천강변인 영랑리 3반에서는 통일신라 고분들이 발견되고 있기 때문이다.
영랑리는 이미 1759년의 자료에도 기록되어 있는 매우 오랜 역사를 가진 마을이다.
1759년에는 둔내면 10개리 중 인구가 가장 많은 마을로 101호에 남자 110명, 여자 120명
총 230명이 거주하였다.
영랑리를 개척한 최초의 씨족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으나 1636년 병자호란때 주성도가 경기도
죽산에서 영랑리로 이주하여 하영랑리에 자리를 잡았고 현재까지 그 후손들이 13대째 살고 있고,
남양홍씨는 원주 단구동, 유만동에서 홍시관이 처음 이주하여 현재 11대째 거주하고 있다.
또 평택임씨가 여주에서 임신·임실 형제가 이주하여 현재 6대째 살고있다. 1914년 지방행정개편에
따라서 가래골, 중산, 점말, 양지말, 하영랑을 합하여 영랑리로 하였다.
그러나 1973년 7월 1일 지방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양지말과 하영랑리가 안흥면으로 편입되면서
성산리가 되었다. 따라서 영랑리는 5개부락에서 2개부락은 안흥면으로 소속되고 가래골, 중산,
점말의 3개 마을이 둔내면 영랑리가 되었다. 1995년 현재는 오히려 호수는 61호로 줄었고 인구도
남자 103명, 여자 100명, 총 203명으로 줄었다. 1995년 현재 61호 203명이 거주하고 있다.

3) 영랑리의 이모저모
영랑리는 교통이 불편한 산간 농촌으로 현대인들이 살기에는 불편한 곳이었고 교육 또한 불편한 곳
이어서 1950년대까지도 한문학자가 아이들을 모아 한학 공부를 시키는 정도였다. 당시 영랑리에는
홍대중, 서암 송병혁, 안창 김사영, 권영상, 창은 권오범, 남헌 전경석, 홍현택 선생과 같은 분들이
계셨는데 그 학통을 보면 다음과 같다.1933년 양촌에서 한학을 가르치셨던 홍대준선생의 제자로는
최상옥, 홍종호, 이윤중, 손각규, 이낙중, 원병구, 고상범, 이시우, 최익표, 차석준, 이희중, 함기복
등이 있고 1933년 중산에서 한학을 가르치셨던 남헌 전경석 선생의 제자로는 지용근, 김원태,
이재섭, 전형중, 권상익, 전군석, 최선준, 김항열, 윤봉근, 김진옥, 최선명, 윤봉선, 송군석, 송호일,
설진석, 윤희석, 권오인, 김갑룡, 김주식, 김창겸, 홍장표, 김장수, 김법태, 주영남, 원종수, 박종구,
최건우, 진찬욱, 김문태 등이 있고, 1952년 양촌에서 한학을 가르치셨던 홍현택선생의 제자로는
홍수원, 김기욱, 고창열, 고성모, 안병태, 안승수, 황익흠, 문진태 등이 있다. 1953년 영호국민학교가
설립되어 1953년 3월 31일부로 허만달 교장이 부임하면서 부터 신식학교 교육이 시작되었다.
1947년 7월에 전기가 가설되었고 1977년 5월에 50여평의 마을 창고가 건립되었으며,
1977년 10월에는 버스가 통과하여 교통이 편리하게 되었다. 1985년 6월에는 30여평의 마을회관이
건설되었으며 1987년6월에는 전화가 가설되었다. 1989년 10월에는 20여평의 노인정이 건립되는등
일상생활이 편리한 마을이 되었다. 또한 1995년 8월에 농산물 집하장이 건립되었고 1996년9월에
저온저장고가 건립되었다. 영랑리에는 이인거(李仁居)의 전설이 전하고 있다.
이인거는 조선 인조시대의 의협심이 강한 인물로 용기와 기백이 뛰어나 큰 뜻을 품고 성장하였다.
처음에는 횡성군 우천면 추동리에 거주하였으나 성장하면서 영랑리 추동에 거주하면서 무술을 연마
하였다. 그는 스스로를 창의중흥대장이라고 칭하고 서울로 진격하려 하였다. 지혜로왔던 그의 누이는
지금 출정하면 반드시 패망할 것 이니 경거망동하지 말라고 만류하였으나 탐관오리들을 제거하고
태평성대를 만들어야 한다는 명분론으로 이인거는 수하에 있는 300여명을 거느리고 서울로
진격하다가 이탁남(李擢男 : 당시 횡성현감)의 상소로 관군에게 체포되어 그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처형되었다. 횡성군 관할에는 지금도 이인거와 관계된 지명이 많이 있다. 안흥면 소사리에
면화재(免禍峙)가 있는데 이곳은 이인거를 처형하여 국가에서 화를 면했다고 해서 지어졌다는
명칭이고, 횡성군 횡성면 곡교리(曲橋里)는 이인거의 말의 다리가 꼬부러졌다는 의미이며, 우천면
백달리(白 里)는 이인거의 승마가 한다리가 되었다 는데서 연유하였다고 전한다.
현재 영랑리에는 이인거가 거주하였다는 곳이 지금도 남아 있다. 또한 영랑리에서는 많은 인재가
배출되었다. 영호리(永湖里) 이장으로 10여년간 재직중 주민에 복리증진과 환난상구(患難相 求)에
헌신 노력한 업적이 지대하여 이민 일동이 이구동성으로 그 공적을 높이 찬양하여 1926년 6월5일에
공덕비를 영호국교 앞대로변에 건립한 엄용섭, 학문이 고명하며 지리와 의서에 통달하여 모든
사람에 존경을 받았고, 저서는 <卿子心傳四券>과 <大韓民曆一券>을 저술한 송요훈, 학문이 고명하여
한학훈장으로 10여년간 아동을 교육하여 많은 인재를 양성하였고, 주민에 추앙과 송성(頌聲)이
높았고 지리와 의서에 고명하여 원근 주민이 많은 혜택을 입었다. 1937년 일제시대에
둔내면 11개리를 배경으로 한 열한개의 시제(詩題)에서 장원하여 시문이 전하고 있는 안치대,
천성이 온후하여 수신제가와 근검절약하여 자수성가에 타인의 모범이 되어 송성이 높았고, 1947년
영호국민학교 건축당시에 밭 1,547평을 희사하여 그 공적으로 독지가송덕비(篤志家頌德碑)가 건립된
김순일, 천성이 강직하고 자수성가하여 가세가 부유하였으며 1971년에 국가시책에 의하여
새마을사업으로 영랑리 추동교(楸洞 橋)를 건축하던 당시에 거액을 희사하여 독지가송독비
(篤志家頌德碑)를 건립한 윤신한, 한학가로서 1994년 10월12일 대전 제5회 전국한시백일장
(全國漢詩白日場) 시제(詩題) 금강추색(錦江秋色)에서 장원(壯元)하였고, 1996년10월17일 서울
성균관 제3회 알성과 거대전(謁聖科擧大典)에서 시제(詩題) 방명유신(邦命維新)에 급제(及第)하여
교지(敎旨)를 받은 송인석, 근검절약하여 자수성가한 사람으로 타인의 모범이 되었으며 1962년
영랑리 회관 부지를 희사하여 주민들이 독지가송덕비를 건립한 김학고, 둔내농협이사로 재직중이며
1995년 영랑리 농산물 집하장 건립시 대지179평을 희사함으로써 주민 모두의 귀감이
독지가송덕비가 건립된 송호봉, 둔내면 예비군 제1중대장 역임한 김진하, 영랑리 회관 부지를
희사하여 송덕비가 전하고 있는 김학비 등이 있다.

4) 영랑리의 지명
◎ 가래골<가래올, 楸洞> : 점촌 동북쪽에 있는 마을. 산기슭에 가래나무가 많음. 가래골, 가래올은
본래 갈래올에서 온 경우가 많으며 그 뜻은 여러 곳에서 올 수 있는
삼거리·사거리를 일컫는 경우가 많다.
◎ 강구바위(선유암) : 중산 서남쪽 강물 가운데 있는 바위.
◎ 건너하영 : 영랑 아래쪽에 있는 마을.
◎ 금방앗간 : 일제시대 이상오가 조항리에서 금맥을 발견하고 10만원을 투자하여 금광석을 채취하였고
광석을 분해하기 위하여 물레방아인 금방아를 놓았다고 함.
◎ 당거리 : 증산 아래쪽에 있는 마을.서낭당이 있었으므로 당거리라고 함.
◎ 말등바위 : 조선 인조때 이곳의 이인거가 난을 일으킬 때 그의 용마(龍馬)가 이곳에서 나왔다고 함.
◎ 산막곡(山幕谷) : 점말 뒤쪽에 있는 마을. 사면이 산으로 막혀 있음.
◎ 새둔지 : 가래골 동쪽 작은 산등성이에 있는 마을.
◎ 속버덩 : 숲버덩이라고도 하며 주천강변에 있는 평지.
◎ 솔골<松谷> : 점말 뒤쪽에 있는 마을. 소나무가 많음.
◎ 쇠돌배기 : 추동 후면 약2㎞에 있는 골짜기.
◎ 쇠죽골 : 중산 서남쪽에 있는 마을. 소를 놓아 먹였다 함.
◎ 숲버덩 : 주천강가 평지에 있는 마을.
◎ 연산봉 : 다섯개의 봉우리가 연달아 있는 산. 조선 인조때 난을 일으킨 이인거가 무술을 닦기 위해
이 산봉우리를 건너 뛰었다고 함.
◎ 음골 : 중산 서남쪽에 있는 골짜기.
◎ 인거터<仁居垈> : 인조5년(1627)에 반역을 일으킨 이인거가 살던 집터.
◎ 점말<店村> : 중산 동쪽에 있는 마을. 옹기점들이 많았음. 우리나라각 마을에는 대체로 점촌이 많이
있는데 그 이유는 조선후기 대원군 시대에 천주교인들을 박해하자 천주교인들이
박해를 피하여 시골마을에 와서 주로 옹기 만드는 일을 하면서 생활하였고 옹기를
만들던 마을을 점촌이라고 한다.
◎ 정문재 : 추동에서 후평으로 넘어가는 고개. 권씨의 정문이 있었다고 하여 정문재라고 함.
◎ 중산(中山) : 영랑리의 중심 마을.
◎ 추동(楸洞) : 가래나무가 많다고 하여 가래골이라고도 하며, 조선인조5년(1627)에 이인거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터가 있다.
◎ 큰덕골 : 피나뭇골 위에 있는 마을.
◎ 후평 : 영랑리 뒤쪽 자그만 들이 있는 마을. 둔내목차

4. 조항리(鳥項里)

1) 조항리의 자연환경
조항리는 둔내면사무소를 기준하여 남쪽에 위치한 리로서 둔내면 12개리 중의 하나이다.
동남쪽으로 안흥면, 동쪽으로는 방림면, 서남쪽으로는 영랑리, 서북쪽으로는 현천리, 동북쪽으로는
우용리와 연접하였다. 또한 동쪽에 높은 산들은 조항리를 감싸주고 서쪽에서 굽이치며 흐르는
주천강은 조항리의 젖줄이다. 조항리는 지형상으로 새의 모 습을 닮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는데, 바일은 새의 머리부분이고, 돌투머리, 새목, 새목재는 새의 목부분이며, 그리고 둔내초등학교
조항분교, 양지말, 동박골 등은 새의 몸통부분에 각각 해당한다. 조항리를 관유하는 주천강 주변에는
들이 형성되어 일찍부터 농경문화가 발달한 곳이다. 주천강을 조항리에서는 바일개울 또는
이호(梨湖)하고도 하는데 이곳은 예전부터 물고기가 많기로 유명하다.

2) 조항리의 형성과 변천
조항리에 언제부터 인류가 생활하였는지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주천강 유역의 다른 여러지역과
마찬가지로 이미 청동기시대, 더 나아가서는 구석기시대부터 인류가 생활 하였다.
그 근거는 조항1리인 바일에서 청동기시대의 유물인 민무늬토기조각들과 간돌 도끼가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조항1리 1반인 바일은 비교적 넓은 들판을 지니고 있는 곳으로, 주로 죽산안씨성을
지닌 사람들이 수백년전부터 살아오면서 마을을 형성해온 곳이기도 하다. 바일의 너믄동에는
이 마을로 이주해온 안씨 선조들의 무덤인 '큰 산소'가 있어 해마다 가을이면 시제를 지낸다.
한편, 조항1리 2, 3반과 조항2리에는 평안도와 경상도에서 이곳으로 이주하여온 사람 들의 후손이
많이 살고 있는데, 이는 일제시대에 ≪정감록≫에 있는 십승지지(十勝之地)의 하나가 이곳이라고
믿고 이주해 와서 마을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이곳에는 동박골이라는 마을이 있는데, 정감록의 상전
(桑田 :지금의 동박골) 십리에 가활갈인야(可活葛人也)라는 문구에서 상전이 바로 이곳을 가리킨다고
믿는 데서 유래한다. 실제로 한국전쟁 중 바일이나 안말과 같은 이웃 마을은 피해가 컸으나 이 마을
주민들은 멀리 피난하지 않고 마을 뒷산에서 난을 무사히 피했다고 하여 피난지로 굳게 믿고 있다.
지금도 이곳에는 동박골은 뽕밭골을 잘못 말한 것이라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정감록≫의 '십승지지(十勝之地)'에는 횡성둔내 상전(橫城屯內桑田)이란 없으며
또한 이름만 상전동일 뿐 뽕나무는 한 그루도 없었는데 1963년에 식상장려책에 의해 이곳 뒷산에
3만여그루를 심어 현대판 뽕나무밭을 이루었다. 1914년 바일, 양지말, 주점촌, 중간촌, 후평,
동박골 등이 합하여 조항리가 되었다. 그러나 1759년도 기록되어 있으므로 1914년에 조항리라는
명칭이 새로 생긴 것은 아니고 전해 내려오던 명칭이다. 1759년 당시에 조항리의 호구는 22호,
남자 30명, 여자 29명 총 59명이 거주하는 둔내면에서는 가장 작은 마을이었다.
70여년 후인 1830년대 기록에도 변함이 없이 22호 59명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큰 변동은
없었다. 그러나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이 1910년 일제의 침략기에 영랑리와 아울러 피난지라고 하여
주로 이북사람들이 이곳에 많이 이주하여 많은 인구가 거주하였다. 원래 전형적인 농촌과
산촌이었던 조항리가 큰 변화를 겪게 된 것은 6·25 전쟁때였다. 소위 여름난리때는 피해가 없었으나
겨울난리때는 조항1리에 있는 바일의경우 피해가 매우 컸다. 격전지였던 이곳은 비행기 폭격으로
30여 가옥 가운데서 10여가옥이나 화염에 휩싸이는 비운을 맞게 되었다. 한동안 마을 앞을 흐르는
주천강을 따라 전시군용도로가 개설되어 군용차들의 왕래가 잦았다. 전쟁의 끝난 후에도 전쟁때의
심리적인 충격이나 이곳저곳에 있던 폭발물에 의한 사고로 여러 사람들이 세상을 떠났으며 폭발물
에 의한 자연훼손도 컸다.
조항리와 현천리의 경계를 이루는 바일개울인 주천강 구비구비에는 전설이 깃든 아름다운 바위들이
많이 있는데, 고기잡이꾼들의 수류탄과 같은 폭발물 투척에 의해 많이 훼손되었다. 1960년대
이후 농촌의 인구와 도시로 이전하는 과정에서 조항리에서도 많은인구가 외지로 이전하였다.
1995년 현재 조항리는 1리, 2리로 분리되어 있다. 1리는 3개반으로 구성되었으며, 57호에
남자 75명, 여자 84명 총159명의 인구가 거주하고 있으며, 2리는 4개반으로 구성되어 있고
18호에 남자 31명, 여자 38명 총 69명이 거주하고 있다.

3) 조항리의 이모저모

(1) 전통과 습속
음력 정월대보름에는 둥근 보름달을 보며 소원성취를 기원하면서 달에 절을 하였고, 사내아이들은
수숫단속에 볏짚을 넣어 새끼줄로 묶은 후 수수단 한쪽 끝에 불을 붙여 눈덮인 언덕위에 올라가
휘둘렀다. 이것을 망우리라고 했다. 한편, 동네 어른들은 안산 앞에 있는 성황당에 가서 마을
공동으로 제사를 지냈다. 오월 오일에는 성황당에 있는 소나무에 그네를 매어 놓고 그네를 타기도
했다. 농촌이라 농사와 관련된 풍습도있다. 예컨대, 비가 너무 오지 않으면 기우제를 지내는
풍습이 그것이다.
동네 사람들은 기우제를 지내고, 개를 잡아 그 피를 용수목에 있는 용바위에 바르곤 했다.
그렇게 하면 비가 온다는 전설에 의해서이다. 이곳 어린이들이 하는 놀이로서는 남자 어린이들이
즐겨하는 딱지치기, 자치기, 연날리기, 제기차기, 팽이치기, 땅따먹기, 눈얼음지치기, 탄피치기 등과
여자 어린이들이 즐겨하는 널뛰기, 오사리, 사방놀이, 고무줄놀이 등이 있었다. 그리고 이곳은
큰개울이 있고 눈도 많이 오는 지역이라 눈위에서 썰매타는 놀이나 얼음이나 눈을 가지고 하는
놀이가 많았다. 특히 이 가운데서 이지역에서 있었던 독특한 놀이로는 탄피치기라는놀이가 있었는데,
그 놀이의 유래와 놀이 방법은 다음과 같다.
6.25전쟁 당시에 격전지였던 탓에 마을 이곳저곳에 탄피들이 많이 널려있었다. 동네 어린이들은
이것들을 가지고 노는 하나의 놀이를 만들었다. 땅위에 직경20∼30㎝ 되는 원을 그려놓거나
한변이 20∼30㎝되는 정삼각형을 그려 놓고, 그 동그라미 속이나 정삼각형 속에 여러개의 탄피를
넣고 멀리 떨어진 곳에서 하나의 탄피를 던져부딪 혀진 탄피들이 동그마리 밖이나 삼각형 밖으로
튀어나가면 튀어나간 탄피들을 소유하는 놀이로서 전쟁을 겪은 이 지역의 놀이라고 하겠다.

(2) 전래민요 및 전승이야기
모내기, 논매기, 밭매기 그리고 길쌈과 같은 일을 할 때 부르는 소리도 있었고, 상례때에 부르는
상두가나 회다지 소리도 있었다. 예컨대, 논매기 소리로서는 '어화얼씬 단호리야'로 시작하는 소리가
특히 많이 불리워졌다. 한사람이 일정한 내용을 담은 소리를 선창하면, 일에 참여하는 다른 모든
사람들이 함께 '어화얼씬 단호리야'하고 화답하는 합창을 한다. 농번기나 추수때는 머리위에 상모를
흔들면서 징을 치고 꽹가리를 두드리며 이집저집 다니는 풍습도 있었다. 상여를 메고 가면서
구성지게 부르는 소리로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었다. "어허렁차 어허 이제가면 언제오나
어허렁차 어허 북망산천 멀고멀어 어허렁차 어허 산길설고 물길선데 어헐렁차 어허 이제가면
언제오나 어허렁차 어허……"그리고 상례때 회를 다지면서 부르는 회다지소리는 한사람이 일정한
내용을 담은 소리를 구성지게 선창하면, 회다지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함께 '에헤라 달회'라고 화답을
하면서 함께 회를 다진다. 전승이야기로는 귀신에 관한 이야기보다는 도깨비에 관한 이야기들이
많이 전해졌다. 논·밭에서 일하고 저녁에 집에 오는 길에 도깨비를 만났다는 이야기도 있었고,
한밤중에 오줌누러 밖에 나갔다가 보았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도깨비는 얼룩덜룩한 옷을 입고,
고깔모자를 쓰고 다니며 키가 큰 것으로 묘사되곤 하였다.

(3) 문화유적 및 고문서
조항1리인 바일의 경우는 옛날에 뒷동산 아래에 절이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확실치는 않다.
바일에서 범바위로 가기전 냇가 옆에는 성황당이 있었다. 몇몇 큰 소나무들은 두팔로 세아름이나
되는 거목들이었으나, 성황당 뒤편에 있던 나무는 6.25 전쟁 후 곧 죽었다. 한동안 그 나무에는
커다랗고 향기로운 버섯이 많이 돋아나 마을 사람들이 신기해 했다. 그 큰 고목은 어느날 비바람에
쓰러져 한동안 뉘어져 있었다. 성황당 앞쪽에 있던 큰 소나무를 비롯하여 성황당 주변의 소나무들도
그후 하나 둘씩 죽더니 6.70년대에 이르러서는 모두 죽어버렸다. 옛부터 마을사람들이 정월대보름날
공동으로 제사를 지내던 성황당도 없어졌다. 단지 성황당과 그 큰 소나무들이 있었던 터만 쓸쓸하게
남아 있다. 바일은 너믄동에는 '큰 산소'라는 곳이 있다. 이곳은 수백년전 이곳에 와서 정착한
죽산안씨(竹山安氏) 연창위파(延昌尉 : 세종대황의 따님인 정의공주의 부군)에 속하는 집안의
묘소이다. 이 묘소들은 옛부터 상석이나 비석들이 놓여 있는 등 그 규모가 큰 편이다.
죽산안씨들은 옛부터 조항리, 현천리등에 많이 거주하고 있었으며, 해마다 가을에는 이곳에서 시제를
지낸다. 최근에는 큰 산소 근처에 사당이 세워졌으며, 그곳에서 북쪽으로 몇 백미터 가면 그곳에도
하나의 사당이 있다. 이곳에서 고문서나 옛 물건들을 가장 많이 소장하고 있으면서 우리전통에 많은
관심을 지녔던 사람으로 안병윤씨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6.25전쟁 당시 겨울난리때 피난중에 행방
불명이 되었고, 집도 비행기 폭격으로 불타버려 그런 자료들도 소실되었다. 특히 이 지역은 전쟁당시
비행기들의 집중폭격을 받아 집집마다 간직하여 오던 옛물건이나 문서들이 소실된 대표적인 곳이기
도 하다. 최근에는 바일에서 청동기시대의 유물인 민무늬토기조각들과 간돌도끼가 발견되어
'조항리 청동기시대 유적지'로 관심을 끌고 있다. 이 가운데서 민무늬토기조각들은 몸체부분이
검정색과 회색빛을 띠고 있는 것도 있고, 안팎면이 모두 갈색인 것도 있고, 안팎면이 모두 붉은 빛이
도는 갈색인 것도 있다. 그리고 간돌도끼는 길다란 화강암 자갈돌의 양면을 갈아 날카롭게 날을
만든 '간양날돌도끼'이다. 길이는 18.6㎝, 넓이 6.4㎝, 두께는 3.6㎝이다.

(4) 조항리와 관련된 이야기
조항리에는 바일이라는 곳을 비롯하여 조항리와 관계되는 이야기들이 많이 있다. 바일로 오는 길은
크게 다섯가지가 있다. 바일의 동북쪽에 있는 황달모루에서 소쿠니재를 거쳐 이르는 길,
바일의 북쪽에 있는 아랫가무내에서 웃다리목새를 거쳐서 바일로 내려오는길, 서남쪽인 범바위에는
바일에 이르는 길, 조항2리에서 바일의 동남쪽에 있는 돌투머리를 거쳐 이르는 길, 그리고 남쪽에
있는 영랑리에서 주천강을 건너 이르는 길이 각각 그것이다. 이 가운데서 돌투머리를 통하여 오는
길은 몇 십년전만해도 사람이 겨우 비껴 다닐만한 좁은 길이었는데 지금은 확장되어 자동차도
다닐 수 있는 넓은 길이 되었다. 바일에 이르는 또다른 길로서 해방전까지는 바일의 동쪽과 서쪽에
각각 나 있는 뒷재와 앞재를 통해가는 길도 있으나 지금은 거의 이용되지 않는다.
특히 웃다리목새길이 전까지는 앞재를 넘어가는 길이 아랫가무내로 가는 주요한 길이었다.
바일 주변의 산과 골짜기로는 바일 앞산(현천리 소재)에는 건넌말, 산소골 등이 있으며, 남쪽에는
안산(案山)이 있다. 안산은 바일 주변에서는 가장 중히 여기는 산이며, 큰 산이기도 하다. 동쪽에는
뒷동산이 있어 정월 대보름날에는 마을사람들이 이 주변에서 대보름달을 맞이하여 어린이들이
망우리를 하는 곳이기도 하다. 뒷동산에서 동북쪽에는 산지당골이라는 골짜기가 있다.
웃다리목새길을 내려와 큰 개울과 작은 개울다리를 건너 바일에 이르게 되면 옛날에 금방앗간이
있었다고 하는 금방앗거리에 이르게 된다. 이곳은 일제시대에 서울에 사는 이상오라는 사람이
조항리에서 금광맥을 발견하고, 10만원을 투자하여 금광석을 채굴한 후 개울물을 막아 물레방아를
만들어 광석을 분해하여 금을 채집하였던 데서 유래되었다. 새목재에서 서쪽으로 나 있는 산능선을
따라가다보면 금을 캐던 옛 금광산터를 볼 수 있다. 여기저기 굴들이 보이는데 이곳이 금을 캐던
곳이다. 이곳에서 캐낸 금광석이 바일에 있는 금방앗간으로 옮겨져 금으로 정련되었는데,
이 광산에는 10여명의 광부가 취업해서 일을 했다고 한다.
금방앗간이 없어진 후 1950∼60년대까지만 해도, 이 주변에 쌓여 있는 고운 돌가루
(이곳에서는 이것을 금가루라고 불렀다)들을 퍼내어 놋식기류를 닦곤 하였다. 금방앗간이 있었던 곳
옆에는 물방앗간이 있었다. 이 물방앗간의 유래는 알 수 없으나1920년대말에 작고한 안무승씨도
이 물방앗간을 운영한 적이 있다고 하는 것으로 보면, 퍽 오래전에 세워진 듯 하다.
바일은 다른 곳에 비해 논이 많고 땅이 비옥하여 이 물방앗간의 규모도 다른 곳에 비해 매우 컸다.
특히 물레방아의 웅장함은 볼만하였으며, 겨울철에 물레방아에 붙어 있는 고드름 또한 그 모습이
장관이었다. 물방앗간은 1970년대초 까지 있었다. 도랑길을 따라 내려가다 현재 안병룡씨가 살고
있는 집쪽으로 꺾어져 가다보면 그 중간지점에 대장간이 있었다고 하는 지점이 있으나, 현재는 그
흔적이 없다. 안병용씨의 집옆에는 안씨사당이 있으며, 다시 그 옆의 언덕에는 예전에
마을사람들에게 무슨 일이 있으면 알리기 위해 종을 매달아 놓았다고 하는 종대거리가 있다.
종대거리를 지나 길을 따라가다 보면 작은 야산이 나오며, 이 야산을 넘으면 너믄동이 나타난다.
너믄동에는 안씨 큰산소와 사당이 있다. 바일에서 돌투머리를 지나면 새목에 이르게 된다.
이곳은 조항1리 2반 지역으로, 동박골로 가는 길과 둔내시장에서 안흥으로 가는 2차 포장도로가
만나는 사거리가 있다. 그 사거리에서 현천교쪽으로 좀 오르다 보면 새목재에 이른다.
이 새목재는 새의 모양을 닮은 조항리 가운데에서 새의 목부분에 있는 고갯길로 조항리 사람이나
영랑리 사람들이 둔내시장이나 자포 곡리 등으로 갈 일이 있을 때 주로 사용하는 길이다.
사거리에서 동박골쪽으로 조금 가다 보면 옛날에 주막거리가 있었던 주점촌에 이르고
옛물방앗간터도 나온다. 물방앗간 앞에 흐르는 개울은 동박골이 그 발원지이며, 서쪽에 있는
주천강과 합류한다. 주점촌에서 조금 더 가다보면 둔내초등학교 조항분교에 이르게 된다.
조항분교는 1950년대에는 영호국민학교의 분교였으나, 그후 학생수의 증가로 조항 국민학교로
이름이 바뀌었다. 그후 다시 주민들의 이농현상으로 학생수가 격감하여 이제는 영호분교와 더불어
둔내초등학교 조항분교가 되었다. 조항분교에서 동쪽으로 더 가면 동박골에 이르게 된다.
과거 어떤 사람들은 동박골은 뽕밭골의 잘못된 표현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데 이상스럽게도 1960년대 초에 이곳이 뽕나무 재배 적합지로 인정되어 수만그루의 뽕나무가
심어져 과거 그런 사람들이 말한 것이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신기하게 현실적으로
들어맞아버린격이 되었다. 동박골은 웃동박골과 아랫동박골로 나뉘어지며 동박골에서 절고개를
넘어서면 평창군 방림면에 이르게 된다. 한편 현천리와 조항리를 휘돌며 갈라놓고 있는 주천강 주변
에는 경치좋은 곳이 많으며, 전설 또한 많다. 예컨대, 용수목은 옛날옛적에 용이 살다가 하늘로
올라갔다는 곳이며, 전설에 의하면 예전에는 물이 매우 깊어 명주실 한꾸러미를 다 풀어야 그 끝이
땅에 닿을 정도였다고 한다. 용바위 주변이 특히 깊으며 용바위와 더불어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용바위라는 이름의 유래는 그 바위가 용의 모습을 닮아서인지, 그 바위 주변에 용이 살다가 하늘로
올라가서 인지는 분명치 않지만 후자일 가능성이 더 짙다. 이곳 용소(龍沼)와 용바위에 얽힌 전설은
다음과 같다. 옛날에 이마을은 몹시 가뭄에 시달린 적이 있었다. 그때 마을사람들은 개를 잡아
그 피를 용바위에 바르고 기우제를 지냈다. 그 이유는 용이 "하필이면 내가 싫어하는 개의 피가 내
못에 있는 바위에 묻었는가?"하고 언잖아하면서 비를 내려 바위에 묻은피를 씻어내린다는 것이다.
이런 기우제의 풍습은 상당히 오랫동안 지속 되었다. 지금도 이곳은 둔내면 지역에서는 물이 가장
깊은 곳이나 장마때마다 토사에 의해 매몰되어서 생각처럼 그리 깊지는 않다. 주변에는 강물을 막아
논에 물을 대는 보(洑)가 설치되어 있다. 예전에는 나무로 된 보였으나 지금은 시멘트로 된 보이다.
그리고 용수목은 용이 나타난다는 전설도 있고 이 주변 마을에서 장수와 같은 큰 인물이 태어난다는
말도 있어 일제시대에는 일본 사람들이 그것을 막기위해 이곳에 이르는 산의 혈을 끊기 위해
큰 말뚝을 주변산에 박았다고도 하는데, 그 지점이 어딘지는 알 수 없다. 웃다리목새길을 따라
바일로 내려오면 두 개의 개울을 건너게 된다. 현천리쪽 산밑을 휘돌면서 흐르는 큰 개울과 바일에
있는 금방앗간과 물방앗간거리 앞으로 흐르는 작은 개울이 그것이다. 예전에는 큰 개울이
글자그대로 물이 많이 흐르고 물살도 제법 센 곳이었고, 작은 개울은 물도 적게 흐르고 물살도
완만하였다. 그런데 1970년대부터 작은 개울쪽으로 물이 더 많이 흐르는 현상이 나타나 지금은
물이 흐르는 수량을 볼 때 큰 개울이 작은 개울이 되고 작은 개울이 큰 개울이 되는 기이한 현상을
나타내고 있다. 큰 개울과 작은 개울 사이에는 모래, 자갈, 바위등으로 구성된 하나의 퇴적층
섬이 형성되어 있는데 이곳은 예부터 철쭉꽃이 많이 피는 곳으로 유명하다. 조항리에는 교관댁이라
고 불리는사람이 있었는데, 그사람이 안광조이다. 안광조의 어릴 때 이름은 안석여로 강릉최씨집
규수와 혼인을 하여 부모님을 지극 정성으로 모셨다. 그런데 어머니가 심한 병을 얻어 앞을 보지
못하게 되었다. 안광조는 그런 병에는 혀로 환자의 눈을 핥으면 낫는다는 말을 듣고, 10년동안
어머니의 눈을 혀로 핥아 어머니의 병을 고쳤다. 병을 고치고 3년후에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마을에서는 그의 효성을 조정에 알렸고 나라에서 타인의 귀감으로 삼고자 조봉대부동몽교관
(朝奉大夫 童夢敎官)으로 봉했다고 한다. 그런 유래로 해서 안광조와 그 후손들을 교관댁이라고
불렀다고 한다.또한 조항리에는 많은 인물이 배출되었다. 육군소령인 길호식, 횡성군 보건소보건
행정계장인 박원도, 원주시 환경정책과장인 박정용, 강원대학교 철학과 교수인 안건훈, 둔내면장을
역임한 안국선, 둔내면부면장을 역임한 안기승, 강원도 농촌진흥원 화훼 계장인안명훈,
초등학교 교감인 이만복, 육군소령을 역임한 이문화, 육군소령인 전상묵, 서울대법원 감찰과장을
역임한 전팔용, 이수건설 이사인 최승해 등이 있다.

4) 조항리의 지명
◎ 금방앗간거리 : 일제시대 이곳에 금을 분해하는 물레방아가 있었다는 데서 유래.
금광석은 새목재에서 서쪽으로 나있는 능선에서 캤다.
◎ 까치박골 : 새목 동북쪽에 있는 마을.
◎ 너믄동 : 바일서 작은 산 너머 남쪽에 있는 마을.
◎ 늦목골 : 동박골 남쪽에 있는 마을.
◎ 돌투머리 : 바일의 동남쪽에 있으며, 바일에서 새목으로 가는 중간지점에 있는 산 아래 지역으로
그 옆에는 강이 흐르고 있음.
◎ 동박고개 : 웃동박골에서 평창군 방림면으로 넘어가는 고개.
◎ 동박골 : 상전동이라고도 하며, 양짓말 동남쪽에 있는 마을로서, 정감록의 십승지지가 이곳이라
믿고 이주하여 사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정감록의 십승지지에는 횡성이라는 지명은
나와 있지 않고 이름만 상전동이다. 6·25때도 피난자가 많았는데, 인근은 피해가 컸으나
이곳은 무사했다고 한다.
◎ 뒷버덩(後坪) : 새목 뒤쪽에 있는 마을.
◎ 뒷재 : 바일의 뒷동산 뒤에 나 있는 고개이며 산길이 있다.
◎ 메기바위 : 바일 앞 개울 한가운데 있으며, 메기처럼 생겼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
◎ 물방앗간거리 : 금방앗간거리와 이웃하고 있으며, 이곳에 있었던 물방앗간은 그 규모가 매우 컸다.
70년대에 없어졌음.
◎ 바일<배일골, 이호동>: 조항리 서쪽에 있는 마을. 새의 목을 닮은 부분에 해당하는 곳으로
분지모양으로 되어있다. 바일은 배일이라고도 하는데, 그 유래는
배(梨)의 모양을 닮아서였다고도 하고, 배나무가 많이 있어 배에서
유래하였 다고도 하는데, 한자로는 이호동이라고 표기하는 경우도 있는 것을
보면 후자와 더 관련이 있는 듯 하다. 또 배일은한자로 "拜日"이라고
표기되는 것을 옛문헌에서 볼 수 있으니 이는 바일에서 덕고산쪽으로
지는 해를 잘 감상할 수 있는 것에서 비롯된 것으로 생각된다.
◎ 바일개울 : 주천강을 가무내와 바일사람들이 일컫는말.
◎ 산지당골 : 바일의 뒷동산 동북쪽에 있는 작은 골짜기.
◎ 상텃골 : 아랫동박골 남쪽에 있는 마을.
◎ 새목재 : 새목 위쪽에 있으며 주막거리에서 현천(玄川)으로 넘어가는 고개.
◎ 성황당거리 : 바일에 있으며 390여년 전에 심었다는 큰 소나무와 이곳에 성황당이 있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지금은 소나무도 성황당도 없음.
◎ 신선바위(神仙岩) : 중간말 뒤에 있는 바위. 경치가 좋아 신선이 놀았다고 함.
◎ 안산 : 바일 남쪽에 있는 산으로 바일에서는 중히 여기는 큰산임.
◎ 양짓말 : 양지편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주변에는 조항분교가 있음.
◎ 용소(龍沼) : 바일을 휘감고 있는 개울로 바일의 동북쪽에 있다. 용바위 주변이 특히 깊으며,
비가 오지 않으면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내는 풍습이 있었다. 이 지역을 용수목이라고
하며, 주변에는 물을 막아 논에 물을 대는 보가 설치되어 있다.
◎ 웃동박골 : 상상전동(上桑田洞)이라고도 하며 동박골 위쪽에 있는 마을.
◎ 작은개울 : 바일고개를 내려오면 두 번째로 나타나는 개울. 그 옆에 금방앗간거리가 있음.
◎ 점말 : 주점촌에서 바일쪽으로 조금 가다가 우측 골짜기를 말한다. 예전에 옹기점이 있었다고 함.
◎ 종대거리 : 바일의 중앙에 있으며, 종을 매달아 놓은 대가 있었다고 함.
◎ 주막거리 : 새목 앞에 있던 마을. 주점촌이라고도 한다.
◎ 중간촌 : 조항분교 남쪽에 있는 마을.
◎ 큰개울 : 바일고개를 내려오면 처음 나타나는 개울.
◎ 큰 산소(山所) : 바일의 너믄동에 있음. 이곳은 수백년전 이곳에 와서 정착한 죽산 안씨 연창위파
(竹山安氏 延昌尉派)에 속하는 사람들의 산소이다. 상석(床石), 비석(碑石)들이 놓여
있는 등 그 규모가 큰 편이며, 가을이면 이곳에서 시제를 지낸다.
근처에는 수년전에 세워진 사당이 있다.

5. 우용리(右容里)

1) 우용리의 자연환경
우용리는 둔내면사무소를 기준으로 하여 남쪽에 위치한 리로서 둔내면 14,073㏊중에서 9.25%에
해당하는 1,301.2㏊의 면적을 가진 둔내면 12개리 중에서 네 번째로 큰 리이다. 동북쪽은 두원리,
북쪽은 자포리, 서쪽은 현천리, 남쪽은 조항리를 경계로 하고있고 서북쪽에는 주천강이 흐르고
있으며, 동쪽은 수리봉이 우뚝 솟아있고, 북쪽은 쇠스랑봉이 웅장하게 솟아 있다.
우용리는 수리봉과 쇠스랑봉의 자락들이 둘러싸고 있는 비교적 큰 골짜기로 이루어졌고 이 골짜기
중심부를 영동고속도로가 관통하고 있다. 주로 수리봉 서쪽을 기점으로 하여 크고 작은 골짜기에서
흐르는 작은 물들이 모여서 우용리 중심부를 흐르고있고 그 주위 경사진 곳에는 넓고 좁은 농경지가
형성되어 논56.3㏊, 밭175.1㏊를 형성하고 있다. 우용리는 하나의 큰 골짜기로 이루워졌기 때문에
비교적 평지가 적고 경사진 곳이 많다.
우용리 동북쪽 골짜리를 문탄(文灘)이라고 하는데 이곳에는 글 잘하는 선비가 많았다고 하여
문탄이라고 하였으며 이 문탄마을에 백구(白鷗)들이 많이 날아와 장관을 이룬다.

2) 우용리의 형성과 변천 둔내목차 우용목차
우용리의 지명 유래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다. 다만 한글학회에서 발행한≪강원의 지명≫에 본래
횡성군 둔내면 지역으로 지형이 우렁이와 같이 생겼다고 하여 우렁이라 하던 것이 우용리로
되었다고 한다.그러나 우용리라는 명칭은 이미 1759년에 명시되었고 둔내면 10개리 중에
하나였으니 1914년에 새로 생긴 명칭은 아니다.
우용리에 언제부터 어떤 씨족이 처음 거주하면서 개척하였는지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그러나 주천강 상류유역에는 대체로 수천년 전부터 인류가 생활하였음을 알 수 있으나 그 기록이
분명치 않으므로 명확히 알 수는 없다. 우용리의 기록이 처음 나오는 것은 1759년이며,
당시 우용리는 둔내면 10개리 중에서 4번째로 인구가 거주하였다.
1914년 지방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당중산, 문탄, 숲새터, 광탄을 합하여 우용리라고 하였고 이후
지방행정제도의 변천으로 여러 개의 리가 변천되었으나 우용리는 변함이 없었다.
1995년 현재 우용리는 1, 2리로 나뉘어 있다. 1리는 64호, 남자 187명, 여자 185명, 총 372명이
거주하고 있고 6개반으로 나누어졌으며, 2리는 31호, 남자 44명, 여자 52명, 총 96명이 거주하고
있고 3개반으로 나누어져 있다.

3) 우용리의 이모저모
해발 812m의 장엄한 수리봉(두리봉)의 정상을 주축으로 동쪽으로 뻗어 내린 곳은 평창군 계촌면이
되고 남쪽으로는 조항리, 북쪽으로 뻗은 곳은 두원리이다. 조항리와 두원리 사이에 중심부에
옹기종기 모여 살고 있는 마을이 우용리이다. 수리봉에서 솟은 맑은 샘은 주천강의 근원으로
마을 중심부를 흐르는 청정천을 중심으로 왼쪽엔 쇠스랑봉, 오른쪽엔 주산을 양쪽으로 품고 있어
포근하고 평화로운 전형적인 시골마을이다.
이 마을은 예로부터 시국이 어지럽고 배고픔을 찾기 어려울 때면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정착하던
곳이기도 했다. 대체로 이마을에 사는 사람들은 배움을 높이 사는 풍토가 있으며 옛날이나 지금이나
특별하게 출세를 하였다거나 부자가 된 큰 인물이 없어도 사람의 본분을 지키며 근면·성실하게
살아가고 있다.
우용리 상류 수리봉을 따라 중부능선쯤에 '호(虎)덫골'이라는 작은 마을이 있다. 이마을은 산세가
험하고 산림이 울창하여 산짐승이 많았는데 특히 호랑이가 많기도 이름난 곳이었다.
이에 사람살기에 항상 불안하여 이들과 대치하는 방법으로 호랑이가 좋아하는 개를 미끼로 "덫"을
놓아 호랑이를 잡았던 곳이라고 해서 호덫골(호덕골)이란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우용리에는 옛날부터 대대손손이 전해내려오던 화합의 민속행사가 전해지고 있는데
이를 '호미시세'라고 한다. 호미시세란 3∼7월 사이에 씨를 뿌리고 김을 메고 가꾸느라 쉬지 못했던
일손을 멈추기 위해 호미를 깨끗하게 닦아 걸어놓고 마음 편히 쉬고자 하는 마을의 행사이다.
호미시세는 매년 7월 20일에 정기적인 축제를 실시하였는데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마을 전원이
참석하고 술과 음식을 전 가정에서 성의껏 자유롭게 마련하였다. 행사는 농악을 중심으로
모든 사람들이 참여하여 흥을 돋구며 마을의 풍년과 무병장수를 기원하고 각 가정마다의 소원성취를
염원하는 농악놀이가 주축이 되어 무형문화로서 자리를 굳혀오다가 6·25사변 이후에 그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우용2리 문탄동네 중심부에 연대를 알수없는 수백여년전부터 조성되어 내려오는 1,500여평 규모의
울창한 숲이 있다. 직경 1m, 높이 20∼30여m의 수십여종의 수백여 그루에 곧게 솟은 숲속에
꾀꼬리, 딱다구리 등의 희귀조류와 노루, 산돼지, 족제비,늑대 등의 동물과 산삼, 더덕, 참나물,
누리대와 수십여종의 야생화가 한데 어울어진 동식물이 군락을 이룬 숲이다.
일제시대 어느해 겨울 집의 처마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많은 눈이 왔던 해에 연료보급이
심각해지자 어쩔 수 없이 나무를 땔감으로 이용하였는데, 그 다음해 여름에 예전에 없던 전염병이
발생하여 많은 사람들이 죽게 되었다. 당시 마을사람들은 벌채 때문에 산신의 노여움을 샀다고
여겼다. 그 다음해부터 숲을 복원하여 오던 중 1985년 7월 10일에 예기치 않던 돌풍으로
수백여그루의 나무가 뽑혀 순식간에 폐허가 되어 버렸다. 현재는 숲의 복원을 위한 관리위원이
선정되어 법적 소유권을 김종원, 안봉열,정연일 3인의 공동명의로 설정하고 이분들을 주축으로
주민과 합심하여 재복원에 힘쓰고 있다.
우용리에는 숲새터와 문탄 중간인 당중산에 저수지가 있는데, 수원은 쇠스랑봉 계곡이다.
저수지는 약간 경사진 곳에 2,000여평의 크기에 2∼3m의 수심을 이루고 있다.
이 저수지는 약 3년동안(1940∼1942) 연인원 9,000여명이 동원되어 이루어진 저수지로

근래에 기계에 의한 저수지와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다. 당시의 장비로는 소가 끄는달구지와 사람이
지는 지게나 소쿠리가 고작이었고, 농기계로서는 가래, 삽, 괭이, 호미가 전부였으니 그 고충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당시 저수지축조는 30여년간 이장직은 맡아온 임황룡이장의 주도하에 이루어졌으며
그 결과 동네 발전의 초석을 다지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1939년부터 6년에 걸쳐 우용2리 문탄 숲속에 300여평 부지에 건평 60여평의 건물로 간이학교가
설치되어 있었다. 당시 일본 정부의 정치 목적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교육을 한국땅에 토착화하여
일본화하려는 의도였으므로 교육활동에 총력을 집중하였다.
거리가 멀어서 학교 다니기가 어렵다고 생각되는 곳이면 학교를 설립하도록 지시하였는데, 당시
정사국, 정해영, 임황룡, 박신봉, 홍대봉, 임현기, 안재민, 김형태씨 등이 학교설립추진위원으로
구성되어 정중삼 목수 주도하에 지역 주민들의 부역으로 연인원 150여명이 동원되어 3개월의
공사기간을 걸쳐 학교가 완성되었다 건축자재는 숲속에있던 버드나무, 오리나무, 사철나무를 주자재로
뼈대를 세우고 흙으로 벽을 바르고 지붕을 볏집으로 덮었으며 아궁이를 만들어 불을 때는 온돌바닥에
책 걸상없이 엎드려서 공부하는 환경이었다.
윗조항리, 윗두원리, 우용리에서 모인 학생 40∼50여명이 재학하였으며 선생님은 특별한 자격기준
없이 소학교 정규과정을 졸업하고 회화 구사력과 많은 단어를 암기하고 있으면 자격소유자로
인정하여 선생님으로 모시게 되었다. 당시 모셨던 선생님은 김원태, 박병권, 성명미상 세분이었고,
보수는 수익자부담으로 약간의 급료로 대치하였다.
우용리 율동에는 송와 배진환 선생이 1915년경부터 서당을 개설하여 무료로 학생을지도하였다.
1917년경에는 강흥길, 어경학, 차동중, 박순규, 윤명한, 박용근, 윤운용,강태희, 김대섭, 윤세문 등
약 30여명의 제자가 있었으며 일제의 갖은 탄압에도 굴하지 않았고 1919년 고종황제 인산일에
동료들과 백립을 쓰고 상경하였다가 기년복을 입도록 하고 귀향하였으며 송와선생의 제자들이
둔내지방에서 많은 활동을 하였다.
또한 등골서당이 있었는데, 등골서당은 60여년전 우용2리 문탄 1반(등골)에 설립되었던 서당으로
이응원 훈장님을 선생님으로 모시고 약 13년 동안 배움의 전당으로 꺼져가는 민족혼의 명맥을
유지하면서 문화민족의 발판을 닦아 가는 유일한 배움의 터전으로 자리잡았다.
당시에 수학한 학생은 연간 5·6명이었고, 총 100여명이 본 서당에서 배출되었으며 현재 생존해 계신
대표적인 분들로는 정천화, 신동식, 김영호, 안해영, 심한섭, 김혁만,최석부, 최석재, 정일화, 박병일,
김종원, 안봉렬, 정선화, 정연국, 박병순, 이석영, 심재성, 김혁만, 김만기씨 등이 경향각지에서
공자께서 하신 말씀을 철칙으로 알고 이를바탕으로 무력해진 도덕성 회복에 앞장서 바르게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
우용리에는 문탄의 방살비·오정문거리 등 중요한 문화재난 민속이 있다. 이것은매우 중요한 것이기에
민속편 또는 문화재편에 자세히 기록하였다.
또한 우용리에서 많은 인재가 배출되었다. 서울 조흥은행에 근무하는 권욱환, 포항공대 화학공학과
박사인 김문현, 행정사무관을 역임한 박병순, 초등학교 교장인 박병일, 부산 남부경찰서 경위인
박창수, 미국LA에서 개인사업에 종사하는 임석규 등이 있다.

4) 우용리의 지명
◎ 광탄(廣灘)<너래울> : 문탄 남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이며 골짜기에서 흐르는 물이 넓게 흐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 문탄(文灘)<그래울> : 우용리 동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 선비가 많이 났었다고 함.
◎ 문탄방살 : 오리나무 숲속에 높이 50미터, 너비 30미터 정도의 숲과 바위가 있고 서낭당이 있었으며,
문탄방살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작은 비가 있음.
◎ 당중산(堂中山) : 우용리에서 가장 큰 마을. 성황당이 있었다고 함.
◎ 새목재 : 너레울에서 조항리로 넘어가는 고개.
◎ 소새목 : 광찬 위에 있는 마을.
◎ 쇠스랑봉고개 : 당중산에서 자포리로 넘어가는 고개.
◎ 수리봉<술봉, 주봉> : 문탄 동쪽에 있는 산. 높이 812m.
◎ 숲새터<새터, 임신대> : 당중 서쪽에 있는 마을. 전에는 새터였는데, 숲이 있으므로 숲새터,
또는 임신대라 함.
◎우렁이 : 우용리의 다른 이름.

6. 두원리(斗元里)

1) 두원리의 자연환경
두원리는 둔내면소재지를 기준으로 하여 볼 때 동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동쪽으로는 평창군 방림면
계촌리와 접하였고, 동북쪽은 자포리 삽교리, 서쪽은 자포리, 서남쪽은 우용리와 경계를 하고 있다.
둔내면 면적 14,073㏊ 가운데 1,278.5㏊를 차지하여 면적으로 볼 때 둔내면에서 여섯번째 되는
마을이다. 두원리의 동북쪽에 솟은 미악봉(美岳峰)은 가을에는 단풍이 아름다워 예로부터 내려오는
둔내에서 제일 경치 좋고 아름다운 11경의 하나가 되었고 동남쪽으로 우뚝솟은 수리봉은 두원리의
상징으로 널리 알려졌으며, 지난 1995년에는 현대 성우리조트가 들어서면서 스키장이 개설되어
경향 각지에 널리 알려졌다.
두원리의 서쪽 우용리의 동북쪽, 자포리의 동남쪽에 위치한 쇠스랑봉(三枝峰)은 두원·우용·자포의
3개리의 경계선에 우뚝 솟아 위용을 자랑하는데, 6·25사변 때 격전지로, 밀고 밀리면서 적군과
우리군 모두에게 수많은 목숨을 앗아간 원한의 봉우리이기도 하다. 또한 이 쇠스랑봉은 면소재지의
남쪽에 위치하여 둔내면 사람들을지켜 주는 파수꾼 역할도 하고 있고 때로는 면민들이 운동대회의
한 종목으로 등산대회를 할 때 쇠스랑봉을 왕복하기도 하는 산이기도 하다.
미악골, 산막골, 곧은골, 옹장골, 구석말 등 길고 짧은 골짜기에서 흐르는 냇물들이 모여 두원천을
이루고, 이 두원천 좌우에는 크고 작은 들과 경사진 농지가 형성되어 225.5㏊의 농경지를 형성하였다.
이 하천은 둔내면시무소 남쪽을 지나 삽교리와 화동리에서 흘러오는 강과 합류하여 주천강 상류를
형성한다.
두원리에 언제부터 인류가 거주하였는지 확실히 알 수 없으나 두원리 중심부 지점인 중두원 도로변에
는 수령 600년 이상의 느티나무가 있고 그 주위에는 상당히 넓은 농경지가 형성된 지리적 환경을
볼 때 이미 오래전부터 우리의 조상들이 농사를 지으며 생활하였을 것이 분명하다. 두원리와 가까이
있는 둔방내리에 우리의 선조들이 적어도 2,000여년 이전부터 농사를 지으면서 큰 마을을 형성하고
살았던 사실로 보아 두원리에도 둔방내리와 같이 적어도 2,000여년전부터 사람이 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두원리 지역의 명칭은 1914년까지는 군곡리(軍谷里)라고 불리워지다가 1914년 일제가 지방행정구역
의 개편과 그 명칭을 개칭할 때 군곡리를 두원리라고 하여 현재까지 불리워지고 있다.
두원리 지역을 최초로 개척하였던 주민이 어떤 주민이었고 또 어떤 성씨가 두원리에서 오래
거주하였는지 현재로서는 분명치 않다. 특히 두원리에서 세거씨족으로 오래산 씨족이 거의 없다.

2) 두원리의 형성과 변천
두원리에 대한 정확한 유래는 알 수 없으나 두태(斗太)가 잘 됨으로 두원리라 하였다는 설이 있다.
조선후기 둔내면의 10개리에는 두원리가 없었으나 1914년에 두원리라는 리명이 새로 생겼다.
1914년 이전에는 두원리의 지역은 군곡리라고 하였는데, 1914년에 그 명칭이 없어졌고 두원리가
새로 생겼다. 군곡리가 두원리로 되었다는 기록은 없으나 횡성현에서 우용리가 55리 되는 지점에
있었고 군곡리는 60리 되는 지점에 있었는데 우용리와 두원리는 경계를 하고 있고 군곡리 위치와
현재 두원리 위치가 일치함으로 조선시대 군곡리를 일인들이 두원리라고 개칭하였던 것이다.
군곡리를 일제시대에 두원리로 고친 이유는 확실치 않으나 일인들이 식민지 정책의 일환으로
전통적인 의미를 갖고 있는 명칭을 없애기 위하여 개칭하였을 것이다.
두원리에는 횡성에서 큰 나무에 속하는 느티나무가 한 그루 있는데 그 주위에는 상당히 넓은 평지와
맑은 물이 흘러가는 경치 좋은 곳이 있다. 여기에는 근래까지도 성황당이 있었고 동리 사람들이 모여
제사를 지내는 곳이었다. 1960년대에 새마을 사업의 일환으로 전국의 모든 성황당을 철거할 때
철거되었으나 느티나무는 아직도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대체로 마을에 큰 나무가 있으면 동리사람들이 이곳을 중심으로 모여 정자를 짓고 이 정자에 모여
쉬기도 하고 이야기도 나누며 지식인들이 모이면 여름에는 시를 짓기도 하는 등 마을의 쉼터요
여론의 수집처가 되기도 하였다. 따라서 현재 두원리에 있는 느티나무를 중심으로 관리들이나
양반들이 모여 시회를 즐겼을 것이고 그래서 이곳은 전통과 유서가 깊은 곳이었는데, 1914년 지명을
고칠 때 전통과 유서가 깊은 곳을 없애기 위하여 군곡리를 두원리로 개칭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1914년에 미악골, 차돌배기, 산막골, 지둔지, 구석말, 옹장골 등을 합하여 두원리라 하였다.
두원리라는 지명에서는 전통성이나 역사성을 찾기는 어렵다.
1759년 당시 두원리의 전신이었던 군이곡리(軍伊谷里)를 보면 둔내면 10개리 중에서 비교적 작은
마을이었으며, 40호에 남자 45명, 여자 40명 총 85명이 거주하였다. 1995년 현재 1, 2리로
나누어졌으며, 1리에는 37호, 남자 77명, 여자63명, 총 140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2개반으로
나뉘었고, 2리에는 37호, 남자 71명, 여자 63명, 총 140명이거주하고 있고 5개의 반으로 편성되었다.

3) 두원리의 이모저모
두원리의 호수는 230여년전보다 38호가 증가하였으며 인구는 200명이 증가하였다.
현재 두원리에 성우리조트 개발이 완료되면 두원리의 호구는 급속히 증가할 것이다.
1995년 12월 성우리조트의 일부분인 스키장이 개설되면서 두원리는 급속히 개발되고 있다.
예전에는 교통이 매우 불편한 곳이었으나 영동고속도로가 두원리 중심부를 동서로 관통하고 있고
성우리조트가 들어옴으로써 도로가 포장되고, 정기버스와 택시 등이자주 왕래하는 등 교통이 매우
편리해졌다. 두원리는 특히 서당이 많았다. 부채골·미악골·중두원·옹장골·차돌배기등 5곳이나 서당이
설치되어 있었고 학동수는 적은 곳은 4∼5명, 많은 곳은 20∼30명이나 되었다.
대체적으로 일제시대에 설치되었거나 해방 후에 설치되었으나 대부분 6·25사변을전후하여 소멸되었다.
이때 두원리의 한학훈장을 하신 분들은 윤훈장, 김기향, 이경극,정기관, 이기준, 이승배, 조덕호와
같은 분들이 계셨고 그분들이 가르쳤던 제자들은 오늘날 대학교수를 비롯하여 공무원, 군인, 교직자,
지방 유지 등 각계 각층에서 활동하고 있다.
두원리에는 재당골·미악골·구석말(공회당옆)·중두원·차돌배기 등지에 성황당이 있었다.
마을사람들은 3월 3일, 9월 9일에 제수를 차려놓고 제사를 지냈으나 1960년대말 70년대초에
미신타파의 일환으로 대부분 철거되었다.
두원리에는 수령 7∼8백년이 넘는 느티나무가 있다. 중두원 영동고속도로 옆에 있는 느티나무는
횡성군 보호수 제694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높이 약 30m, 밑둥둘레 6m, 차지면적 600㎡ 정도의
큰 나무로 수명은 약 800여년 정도 된 것으로 추정되며 횡성군에서 가장 큰 나무이다.
이 나무 옆에는 성황당이 있어 마을사람들이 제사를 지내기도하였는데, 1960년후반 새마을운동으로
성황당은 없어졌으나 마을의 수호목으로 마을사람들의 보호를 받고 있다. 마을사람들은 더운
여름에는 피서처로 이 나무밑으로 모이기도 하며 시장을 왕래하는 사람들의 쉼터로 애용된다.
또한 두원리에는 강원공무원문인협회 회장인 김경일, 둔내 안일의원 원장·영월 안일의원 원장·속초
안일의원 원장·속초의사협의회회장을 역임한 안상열, 강원대학교인문사회대 학장과 인문대학장·
교수평의원회의장을 역임한 원영환, 4-H횡성군 연합회장과 강원도 연합회장을 역임한 윤세종,
둔내면 호병계장과 재무계장을 역임한 이종구, 둔내농협조합 4·5·6대 조합장과 대통령 선거인단을
역임한 이종인, 횡성군청 양정계장·사회계장·둔내면 부면장을 역임한 이태원,
육군중령예편·원주향교 장의(掌議)·강원대학교 강사를 역임한 전석만 등이 있다.

4) 두원리의 지명
◎ 간직동(間直洞) : 미악동과 삽교리( 橋里)의 직동사이에 위치한 마을. 큰 고든골이라고도 한다.
◎ 고든골<直洞> : 중두원 동북쪽 곧은 골짜기에 있는 마을.
◎ 구석말 : 중두원 남서쪽에 위치한 마을로 이인거의 난이 실패하자 그 용마가 빠져 죽었다는
전설이 있는 연못이 있었다.
◎ 굴뚝골 : 상두원 동남쪽에 있는 마을 지형이 굴뚝처럼 생겼음.
◎ 두태버덩 : 두원리의 다른 이름. 수리봉 서북부에 위치, 현재 스키장이 되었음.
◎ 둥지 : 지형이 제비 둥우리처럼 생겼다하여 붙인 이름.
◎ 미악골(美岳谷) : 상두원리 동북쪽 마을. 가을이면 단풍이 아름답다.
◎ 삼막곡(三幕谷) : 두원리에서 가장 위쪽에 있는 마을. 산막이 있었음.
◎ 상두원 : 두원리 위쪽에 있는 마을.
◎ 선바위 : 상두원에 있는 바위. 부자의 전설이 있으며, 오래된 묘가 있다.
◎ 설통골 : 상두원에서 감동지로 넘어가는 고개. 섬털모기 아래쪽에 있는 마을.
◎ 성털모기<성목재, 성항현> : 두원리에서 감동지로 넘어가는 고개.
◎ 양짓말 : 고든골 아래 양지쪽에 위치한 마을.
◎ 옹장골 : 중두원 동북쪽에 있는 마을.
◎ 왜가리봉 : 두원2리 4반의 앞산으로 왜가리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
◎ 쟁피재 : 상두원에서 평창군 방림면 계촌리로 넘어가는 재. 노루가 많음.
◎ 중두원 느티나무 : 두원리 중심부에 있는 나무로 수령이 600년 이상 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1970년대 새마을사업을 하기전까지는 이 느티나무 밑에 성황당이 있어 마을 사람들이 모여 제사를
지내며 마을의 안녕과 번영, 풍년을 기원하였다.
◎ 중두원 : 두원리 중앙에 있는 마을.
◎ 지둔지 : 중두원리와 우용리에 연접하였고 차돌배기 남쪽에 있는 마을.
◎ 차돌배기 : 두원리 입구에서 약 2㎞지점 큰길 왼쪽으로 지둔지 맞은 편에 있는 마을.
차돌이 많아 생긴 이름임.
◎ 하두원 : 두원리 아래쪽에 있는 마을.

7. 자포리(自浦里)

1) 자포리의 자연환경
자포리는 둔내면 중심지로서 면사무소가 위치하고 있다. 면소재지를 중심으로 하여 서쪽으로는
주천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으며, 동남쪽에는 쇠스랑봉(620m)이 우뚝 솟아 있고, 북쪽으로 이름없는
높고 낮은 산들이 자포리를 겹겹이 둘러싸고 있다. 동쪽에서흘러오는 두원천은 동남쪽으로 흐르다가
면소재지 서남쪽 300여미터 지점에서 주천강과 합쳐진다.
동쪽은 두원리, 동남쪽으로는 우용리, 남서쪽으로는 현천리, 서쪽으로 주천강을 사이에 두고
둔방내리, 북쪽으로는 마암리, 북동쪽으로는 석문리와 연접해 있고 그 면적은 682.2㏊이며 이중에서
밭이 122.9㏊, 논이 52.3㏊, 임야가 256㏊, 기타32㏊로 되어 있어면적은 비교적 작은 편에 속하나
면소재지로 인구는 가장 많다.
서쪽으로 흐르는 주천강의 수량이 지금 그리 많지 않으나 옛날에는 작은 상선이 드나들 정도로
수량이 많았던 듯 하다. 그래서 옛날 시인들은 자포상선이라는 시제로 한시를 지었다.


2) 자포리의 형성과 변천
원래는 자포곡리(自浦谷里)였으나 1914년 리·동명을 3자로 통일할 때 자포리가 되었다.
그러나 현재도 자포곡리라고 각종 지도에 기록되어 있다. 그 연원은 알 수 없으나 자포리를 소재로
한 안운환(安云渙)의 시 자포상선(自浦商船)에 보면 옛날 이곳 개울물이 많아 상선이 드나들었다는
것으로 보아 상행위가 상당히 활발한 곳이었다고 추측되며 이곳에 배가 닿는 포구가 있어
자포곡이라고 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그리고 1983년 둔방내리 유적발굴결과에 의하면 인근지역인
자포리, 현재 시장지역의 지형은 원래 개천이었는데 큰 홍수로 지형이 크게 바뀌었다는 것이며
홍수 이전에는 현재의 지형보다 동쪽으로 주천강이 흘렀다는 것이다. 현재와 같은 지형이 형성된
것은 일제시대에 시장북쪽 바람부리에서 주천강변 동쪽에 수백미터의 제방을 쌓았기 때문이며,
제방을 쌓기 전에는 둔내초등학교 운동장을 비롯하여 시장 서쪽으로 주천강이 흘렀다고 전한다.
이 제방을 언제 쌓았는지 분명히 알 수는 없으나 1920년대에 둔내면소재지를 현천리에서 이곳으로
옮긴 후에 쌓기 시작하였고, 그후에도 제방축조사업이 계속되었으며, 둔내면장을 지낸 강흥길면장의
공이 컸다고 전해진다. 1914년 알가지, 바람부리, 산제당, 시장터, 옹장골, 자래골 등을 합하여
자포리라고 하였다. 그러나 자포곡리라는 명칭이 이미 1759년부터 존재하였으니 1914년에 새로
생긴 명칭은 아니며 다만 1914년 당시 지방행정명칭을 변경할 때에 몇 개의 부락을 합쳐서 붙인
이름이다. 1759년 당시 자포곡리는 38호에 남자 33명, 여자 40명 총 73명이 거주하는 비교적 작은
마을이었다. 그러나 1920년대 둔내면사무소가 현천리에서 자포리로 이전되면서 급속히 발전하였다.
1995년 현재 자포1,2리로 분리되었는데, 1리가 301호에 1,024명이 거주하며, 2리는 52호에 146명이
거주하는 둔내면에서 가장 큰 마을이 되었으며, 1리는 7개반, 2리는 4개반으로 편성되었다.

3) 자포리의 이모저모
자포리가 현재 1,2리로 분리되어 있어 1리는 면소재지를 중심으로 시장이 있고 각종 공공기관이 있는
번성한 곳이고, 2리는 농촌지역이다. 따라서 1리의 면적은 309.7㏊이고, 2리의 면적은 372.5㏊로
1리보다 2리의 면적이 훨씬 넓으나 호구는 1리는 323호 1,046명의 인구가 거주하는데 비해 2리는
52호에 170명의 인구가 거주하고 있다. 따라서 자포리에는 시장을 중심으로 인구가 집중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둔내면 14,073㏊중에서 자포리는 682.2㏊로 불과 4.85%정도 밖에 해당되지 않으나
호수는25.36%가 넘는 375호이고, 인구는 25.65%가 넘는 1,216명이 거주하고 있다.
자포리에는 면사무소를 비롯하여 농업협동조합, 우체국, 둔내초등학교, 둔내장로교회,복지회관 등 각종
공공시설이 있고 특히 둔내면 5,700여명의 생활필수물을 제공하고 농민들의 생산물을 판매하는
둔내시장이 번성하여 자포리로 인구라 집중될 수 밖에없다. 또한 최근에는 두원리, 우용리에 걸쳐서
성우리조트가 설치되어 수많은 사람들이 자포리를 통해 황래함으로 교통이 번잡할 뿐만 아니라
둔내시장이 더욱 활성화될 것이므로 자포리의 인구는 더욱 증가할 것이다. 자포리는 면소재지가
아니라 멀지않은 장래에 둔내읍의 소재지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자포2리에는 자포리와 석문리가 공동으로 사용하는 저수지가 있다. 이 저수지는 1983년 자포2리와
석문리가 공동으로 만들었는데 국가에서 보조를 받고 또 자체에서 일부 부담하여 2년에 걸쳐
완성하였으며 자포리와 석문리가 공동으로 농업용수로 사용한다.
자포리 산지당에 1875년경 서당이 있었으며 신명도선생이 학생들을 지도하였다.
서당은 대략 1953년경에 없어졌다고 하는데, 이곳에서 공부한 학생들로는 김기원, 임종원, 이동춘,
손용득, 이용근 등이 있다.
자포리에는 웃자필과 하자필에 성황당이 있었다. 제사는 성황계 계장이 주관하였고, 관리는 주민이
공동으로 관리하여 왔는데 1970년경에 없어졌다.
자포리에는 많은 인물이 배출되었다. 육군 원사이며 보국훈장·국방부장관표창·군단장표창 수여받은
김이수, 통일주체국민회의 초대 의원과 진부농업협동조합 조합장을 역임하였으며 신민주공화당
창당발기인인 김재춘, 전자공학박사이며 LG반도체연구소 연구원인 박화식, 사회학 박사이며
제주대학교 교수인 손병철, 수원삼성보험회사 지점장인 손영철, 절도청 총무과 사무관과 철도청
공무원 교육원 교수인 심치호,농협 군지부 운영위원을 역임한 임종원, 원주 봉산1동장인 원승묵,
동양엘리베이터사장인 원종성, 공주사대학장을 역임한 임한영, 신진운수 대표이사인 이병훈,
(주)CY상사대표이사와 한국시크린 인쇄공업협동조합 이사장을 역임하였으며 인천전문대학교
명예교수인 이창엽, 육우신풍중·고등학교 교장을 역임한 임종대, 횡성군 영농기술자 군연합회장·
평통자문위원·둔내초등학교총동창회장·농협 군지부 운영위원인 임종원, 육조본부군막대장과 춘천시
소장을 역임한 정양진 등이 있다.

4) 자포리의 지명
◎ 골알가지 : 알가지 북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
◎ 바람부리 : 시장터 북쪽에 있는 마을. 바람이 많이 부는 곳이라는 뜻.
◎ 배바위 : 자포2리에 배바위가 있었다고 함. 이곳이 옛날 나루터였으리라 추측된다.
◎ 산지당(山地堂) : 아랫자필 동쪽 산중턱에 있는 마을.
◎ 생골보 : 시장 북쪽에 있는 보.
◎ 선의재 : 옻나뭇골에서 삽교리 맷둔골로 넘어가는 재.
◎ 쇠스랑봉 : 시장터 앞에 있는 산이며 산봉우리가 세 개로 쇠스랑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시장터 : 자포리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마을. 5일·10일 장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으나 예전에 비해
번성하지 못하고 있으며, 지금은 상설 점호가 많이 형성되어 있다.
◎ 아랫자필 : 자필의 아랫 마을.
◎ 알가지 : 시장터 동북쪽 마을.
◎ 약사사 : 둔내초등학교 뒤쪽 산기슭에 위치하고 있는 절.
◎ 양짓말 : 시장터 동북쪽에 있는 마을. 양지쪽에 있는 마을이라는뜻.
◎ 옹장골 : 양짓말 위쪽에 있는 마을.
◎ 옻나무골 : 웃자필 동쪽에 있는 마을.
◎ 용고개 : 아랫자필에서 삽교리로 넘어가는 고개.
◎ 웃자필 : 자필에서 위쪽에 있는 마을.
◎ 음달말 : 쇠스랑봉 밑 응달쪽에 있는 마을.
◎ 자래골 : 옻나무골 북쪽에 있는 마을.
◎ 지피실 : 자포리의 딴 이름.
◎ 할미바위 : 옻나무골 앞 선의재 중턱에 있는 바위.
◎ 화동사 : 자포리 시장에서 두원리로 진입하는 입구에 위치하고 있으며, 천태종에 속하며 지난
1992년 창건되었다.

8. 석문리(石門里)

1) 석문리의 자연환경
석문리는 둔내면사무소를 중심으로 하여 북동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동남쪽은 자포2리, 동북쪽은
삽교리, 서북쪽은 마암리, 서남쪽은 둔방내리, 남쪽은 자포1리에 인접해 있는 마을이다.
뒷산이 모두 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마을에서 마암리로 넘어가는 고개는 깎아지른 듯한 돌로 되어
있는데 그 형상이 돌문과 같다하여 유래된 이름이다.
상석문리쪽에서 석문바위로 된 바위산을 보면 북쪽에서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5개의 골짜기를 이루고
있으며 골짜기 양쪽으로 바위가 마치 문기둥처럼 솟아 절벽을 이루고 있어 1문, 2문, 3문, 4문,
5문이라고 부른다.

이 돌산은 앞쪽인 석문리에서 보면 상여(喪輿)를 꾸며 놓은 듯하고 마암리에서 보면 병풍처럼 보이기
도 한다. 또 이상한 것은 석문리에서 불이 나면 마암리까지도 연이어불이 난다는 전설이 전해오는데,
실제 그런 일이 자주 있었다고 한다. 석문리는 주거촌락과 농경지가 하천주변에 형성되어 있다.
우선은 삽교리에서 흘러내려오는 개천이 대략 석문리의 중심을 통과하고 있으며, 그 아랫쪽으로는
자포2리에서 흘러오는 개천이 석문리 판관터를 거쳐가고, 석문천 뒷쪽으로는 독바위골에서 흘러오는
작은 개천이 석문천에 합류하고 있다. 이에 따라 석문천 주변과 판관터에는 비교적 평탄한 농경지가
형성되어 있다. 총면적 924.4㏊, 논이 75.6㏊ 임야가 614.3㏊, 기타 57.2㏊로 구성된 리로 임야가
전면적의 66.4%이상을 차지하고 있어 경작지가 비교적 적은 리이며, 둔내면 총면적 14,073㏊중에
6.56%를 차지하는 비교적 작은 리이다.

2) 석문리의 형성과 변천
석문리에는 언제부터 사람이 살면서 하나의 마을을 형성하였는지 그 분명한 기록이없으므로 자세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주천강 유역의 농경지에서 이미 수천년 전부터 농사를 지으면서 우리의 조상들이
살았듯이 주천강의 지류의 하나인 석문천 좌우에도 크고 작은 농토가 형성되었으니 석문천을
중심으로 이 석문리에도 이미 수천년전부터 우리의 조상들이 생활하면서 석문리라는 하나의 마을을
형성하였을 것이다. 수천년전의 씨족들이 살면서 마을을 형성하였던 그 시대의 씨족의 후예들 중
오늘날 석문리에 사는 사람은 없다. 인류의 자연이동에 따라 그 때에 살던 씨족들은 어디론가
이동하였고 다른 곳에서 살던 씨족들이 다시 이 석문리에 모여들어 오늘의 석문리를 형성하였다.
석문리에는 특히 꽃벼루라고 부르는 강변에 경치 좋은 곳이 있다.
사서(史書)의 기록에 석문리가 처음 나오는 것음1759년≪여지도서(與地圖書)≫이다.
이 기록에는 석문리에 31호가 있었고 남자 40명, 여자 35명, 총 75명이 거주하였다고 기록하였다.
따라서 석문리에는 지금부터 230여년전에 30여호의 가정이 농사를 지으며 옹기종기 모여서 살았음을
알 수 있다.
석문리는 1914년 지방행정제도를 개편할 때에 독바우골. 판관터, 꽃벼루, 무당골을 합하여
석문리라는 둔내면 관할의 행정리를 두었고, 이후 현재까지 석문리는 둔내면 12개리 중의 하나로서
1995년 현재 석문1, 2리로 분리되었으며, 1리에는 60호에 남자 113명, 여자 108명, 총 221명이
생활하고 있고, 2리에는 48호에 남자 89명, 여자 99명, 총 188명이 생활하고 있다.
1리는 3개반, 2리는 4개반으로 편성되어 있다.

3) 석문리의 이모저모
석문리는 문처럼 생긴 바위가 있기때문에 석문리라 불리고 있다. 석문바위 위에는 촛대바위가 있는데,
옛날 아이를 낳지 못한 부인이 이 바위에 올라갔다가 자식을 보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석문바위 하단부에는 굴이 있는데 약 5∼6평 정도로 박쥐가 서식하고 있다.
석문리에는 여우밭골이라는 지명이 있다. 이 지명의 유래를 살펴보면, 예전에 한 농부가 소로 밭을
가는데 처음보는 여자가 나타나 배가 고프니 밥을 달라고 해서 밥을주었더니 고맙다고 하면서 밭가는
일을 도와주겠다고 하였다. 그런데 일을 하다가 여자가 소와 마주치면 소가 여자를 근처에도 못오게
하였다. 이를 이상히 여긴농부가 막대기로 여자를 쳐 쓰러뜨리고 살펴보니 사람이 아니라 여우였다는
이야기에서 여우밭골이라는 이름이 유래하였다고 한다.
또한 석문리에는 돌고개라는 지명이 있다. 이곳에서 물이 돈다고 하여 돌고개라고 부른다.
이 돌고개에는 깊은 구멍소가 있는데, 예전에 유씨가 이 근처에 송아지를 매놓고 일을 하다가 저녁때
송아지를 찾으러 가니 송아지는 보이지 않고 고삐만이 물속에 있어 다음날 마을사람들을 불러 고삐를
끌어당기니 송아지는 보이지 않고 구렁이가 딸려나왔다고 한다. 마을사람들은 구렁이를 구멍소로
돌려보냈다고 하는데 지금은 폭우에 쓸려온 흙 때문에 흔적만 남아 있다.

석문리와 마암리 사이에는 말무덤이라고 부르는 곳이 있다. 예전에 백씨성을 가진 집안에서 힘이
장사인 비범한 아이를 낳았는데, 집안을 망칠 염려가 있다하여 맷돌로 눌러 죽이게 되었는데, 이후
백마가 나타나서 삼일동안 울고 돌아다니다가 이곳에서 죽었다고 전한다.
석문리에서는 지난 1981년경부터 정월대보름날에 부인회 주최로 윷놀이·널뛰기 대회가 열려 마을
주민들의 잔치가 벌어지며, 또한 마을 주민으로 구성된 경로회가있어 매년 이장집에서 중복날 노인을
중심으로 복놀이를 하고 있다.또한 석문리에 많은 인재가 배출되었다.
강원공무원문인협회 회장인 김경일, 서강대 교수인 노승인, 원주초등학교 교감인 박희문,
서울 성균관 알성과 진사인 손용덕, 둔내석문리 훈장인 장용하, 둔내 체육부 체육회장인 전성택,
둔내면사무소 재무계장인 전인재, 도의원인 전인택, 군농협직원인 정대하, 춘천지도소 지도연소장인
정덕화, 둔내면장을 역임한 정봉덕, 육군대령인 정연수, 철원 영월교육청 장학사와 안흥초등학교
교장을 역임한 추교삼, 원주기독교병원 간호사인 추미경, 석문리 훈장인 추병표, 소사양조장 대표이사
인 한영준, 둔내장로교회 장로인 홍선문 등이 있다.

4) 석문리의 지명
◎ 꽃벼루<花峴> : 석문리 서남쪽에 있는 마을. 둔방내리와 경계를 이루는 마을로 주천강이 흐르는
서쪽 벼랑에 아름다운 꽃이 핀다고 하여 꽃벼루라고 하였다.
◎ 독바우골<甕岩洞> : 석문리의 가장 북쪽에 위치한 마을 독처럼 생긴 바위가 있다
고 하여 독바위골이라고 한다.
◎ 돌고개<石峴> : 석문리 서쪽에 있는 고개. 고개마루가 전부 돌로 되어 있다.
◎ 방아재 : 석문리 어귀에 있는 고개.
◎ 망태골 : 무랑골 위쪽에 있는 마을.
◎ 맹자골 : 옛날에 이 골짜기에서 호랑이가 담배대를 물고 맹자책을 읽었다는 이야기가 있어
맹자골이라 붙여졌다는 전설이 있다.
◎ 물안골<수용동> : 석문리 북족에 있는 마을. 예전에 마을 입구에 유명한 약수가 있었다 함.
예전에 이 물안골 약수터 앞에는 부자집이 있었는데 하도 손님의 출입이 많아 이집 며느리가
매우 힘들었다. 어느날 스님이 와서 시주를 구하기에 며느리가 시주를 후하게 주며 집안에 손님이
오지 않게 할 방도를 물으니 스님이 개를 잡아 약수에 넣으라 하였다. 며느리가 그대로 하니 약수는
맹물이 되고 손님은 끊어지고 부자집도 점차 가세가 기울어 망하게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 사태골 : 석문2리 상석문리 동쪽 산기슭에 있는 마을. 예전에 선비가 출생한 곳이라 함.
◎ 상석문리 : 석문리 위쪽에 있는 마을.
◎ 서우고개 : 화동리와 접경이며 화동리·삽교3리 사람들이 이 석문리를 경유하여 시장으로 갈 때
이 고개를 넘어다녔다고 함.
◎ 석문바위 : 사태골 앞에 있는 바위. 큰 바위가 동구(洞口) 양쪽에 서있어서 마치 문처럼 되었다.
◎ 선암동<선암나드리> : 선유암이 있는 주변 마을.
◎ 선유암소(仙遊岩沼) : 서남소라고도 하며 경치가 너무 좋아 신선들이 내려와 놀았다는 아름다운
곳으로 주천강 지류가 흐르는 이곳은 넓은 바위가 있고 깊은소가 있어
여름이면 피서객들이 찾아드는 곳이며 많은 학생들이 소풍을 오기도 하는 곳이다.
◎ 선재들 : 판관터 위쪽에 있는 마을. 석문1리 4반에 있는 마을로 이 마을에 부처같이생긴 바위가
있었는데 누군가 바위를 묻어 버렸다 한다.
◎ 송치들 : 선재골에 있는 마을.
◎ 양짓말 : 판관터 양지쪽에 있는 마을.
◎ 여우밭골<호전동(狐田洞)> : 예전에 콩을 심던 농부가 한 여자가 밥을 주고 그 사례로 콩심는 것을
돕게 하였는데, 소가 여자를 피하는 것을 이상하게 여긴 농부가 채찍으로 여자를 때리니 여자가
여우로 바뀌어 도망갔다고 한다. 이곳을 여우가 일하던 곳이라 하여 여우밭골이라고 하였다 한다.
◎ 용고개 : 판관터 양짓말에서 삽교리로 넘어 가는 고개. 해방전에는 이곳이 용이 승천한 곳이라 하여
이 고개로 시체운구를 금지하였다고 한다.
◎ 원수골(元帥洞) : 예전에 태기왕이 태기산으로 가는데 주력부대는 갑천·청일을 경유해 가고 일부
병력이 둔내로 들어와서 석문리 원수골에서 하룻밤을 유숙하고 갔다고 한다.
당시 인솔자가 '원수'였다고 하여 원수골이라고 전한다.
◎ 음짓말 : 판관터 음지쪽에 있는 마을. 이곳에는 바람부리라는 곳이 있는데 유명한 약수가 있었다 함.
◎ 조롱고개 : 예전에 원주이씨가 조롱말을 이곳에 매어 놓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
◎ 판관터<判官垈> : 석문리 남쪽에 있는 마을로 판관이 났다 함. 석문1리 2반에 위치한 마을이며,
이전에 이 마을에 판관 벼슬을 하던 사람의 집터가 있었다고한다. 판관이란 명칭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이름인데, 중앙이나 지방에서 근무하였으며 그 품계도 다양하여 종9품에서 종5품까지
있었다.
◎ 하석문리 : 석문리 아래쪽에 있는 마을.
◎ 행상고개 : 판관터에서 상석문으로 넘는 고개. 상석문에 있는 공동묘지를 가기 위해 행상(상여)이
넘어야 하는 고개라는 데서 유래했다.

9. 삽교리( 橋里)

1) 삽교리의 자연환경
삽교리는 동경128°15'45", 북위 37°32'03"에 위치하고 있으며, 둔내면사무소를 기준으로 하여
동북지역에 자리잡고 있다. 대부분이 동쪽으로 평창군 봉평면 지역과 접하고 있고, 극히 일부가
방림면 계촌리와 접해 있다. 그리고 남쪽으로는 두원리, 서쪽으로는 자포곡리·석문리·화동리,
북쪽으로는 화동리와 접해 있다.
면적은 둔내면 전체면적 14,073㏊ 가운데 18.7%정도인 2,632.3㏊를 차지하여 면적상으로는
면내에서 가장 큰 마을이다. 삽교리는 동북부지역이 태기산에서 청태산에 이르는 산지지역을 접하고
있기 때문에 둔내면 지역내에서 가장 고지대에 속한다고 할 수있으며, 평지는 거의 없고 계곡천
주변지대에 비교적 경사도가 낮은 지대가 형성되어 주로 이곳을 개간하여 농지로 활용하고 있다.
따라서 대부분 임야이고 농지는 적으며농지 또한 대부분 밭이고, 논은 적다. 2,632.3㏊중에서 임야가
2,182㏊이고, 밭이317.83 ㏊,논이 61.5㏊, 기타가 71㏊이다.
둔내지역은 태기산 남서지대에서 발원하는 주천강 상류가 되기 때문에 모든 수계는이 강에 합류하게
된다. 삽교리의 수계는 삽교1리의 계곡천이 가장 큰 수계이며, 이수계는 매당덕으로부터 바디장골·
옻밭골·대바위골·선바위·골말·국적동 등 이지대에서는 비교적 큰 골짜기의 지류를 합류하며 흘러내려
석문리를 통과하여 주천강에 합류한다. 이외에 삽교3리 지대의 수계는 대부분 화동저수지에
유입되었다가 주천강 상류로 합류하고, 삽교2리 곧은골 지대의 수계는 자포저수지를 지나 자포2리를
거쳐 역시 주천강에 유입한다.

2) 삽교리의 형성과 변천
삽교리는 다른 마을에 비하여 상당히 늦게 개척된 마을로, 그 시기는 18세기 중반 삽교 안석경이
이곳에 은거하면서 부터라고 한다. 그러나 "삽교리"라는 마을명칭이 정확히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안석경이 이곳으로 은거한 시기가 18세기 중반인데 대략 유사한 시기에
편찬되었던≪여지도서≫에 '삽교리'라는 명칭은 보이지 않으며, 19세기 후반(1871)에 편찬된
≪관동읍지≫에는 그 명칭이 보인다.
따라서 삽교리라고 하는 공식적인 리의 명칭은 18세기 후반부터 1871년 사이에 생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안석경이 이곳에 거주하였을 당시 이미 삭교라는 명칭은 존재하였던 것을 그의
한시를 통하여 알 수 있다. 즉 그의 문집의 보면 자석문인삽교라고 하는 시제가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삽교리라고 하는 공식적인 마을 명칭이 있지는 않았지만 안석경이 거주하던 곳을 삽교하고
불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안석경이 이곳에 오기 전에 다른 사람이 이곳에 살고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이 마을에 오랫동안 거주해 온 가계를 조사한 바에 의하면 8대조 이상되는 조상이 이 마을로
이주하여 왔다는 집안이 없는 것으로 보아 삽교 안석경이 이곳에 왔을 때는 이 마을에 아무도 살
않았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리라 생각된다. 특히 삽교가은거하는 마당에 여러 사람들이 거주하는
번거로운 곳을 택하였을 리가 없다는 점을 생각해 보더라도 처음 안석경이 삽교리로 왔을 때는
아무도 거주하지 않았고 그 후에 사람들이 점차 모여 들면서 마을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 마을에는 순흥안씨를 비롯하여 경주김씨와 김해김씨·강릉최씨가 가장 오랫동안 거주해온 가문이다.
특히 이 마을에는 산간마을임에도 경주김씨와 김해김씨 집안의 재실이 있으며, 7∼8대를 거주해온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따라서 이 삽교리 마을은 순흥안씨·경주김씨·김해김씨·강릉최씨 등 4대성씨가
초기 개척자라고 할 수 있다.
개척 초기에 입향한 가문의 내력에 대해서는 다른 장에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
이 마을 형성 초기에 이주해 온 사성씨는 물론 지금도 다른 성씨에 비한다면 많다고는 할 수 있지만
전체가구의 20%정도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지는 못하다. 특히 전체가구의 60%정도는 이 마을에
거주한지 3대이하이고 그 가운데 대부분은 세대주 본인이 이 마을로 이주해 왔거나 이주해온지 20년
이내인 경우에 해당한다. 이러한 마을 구성원의 교체현상은 전통의 단절과 변형의 한 원인이
되었으리라 생각된다. 이곳 삽교리에는 현재 입수 가능한 통계내에서 보다라도 호구의 감소의 폭이
매우 큰 곳으로 1972년대 초에 비하여 약19.4% 수준으로 감소하였다. 그러나 주민들의 증언에
의하면 일제시대 말기∼1950년대에는 70년대 가장 호구가 많았던 시기보다 대략두배 가량은 더 많은
사람들이 살았다고 한다.
특히 그 근거는 확실하지 않으나 삽교1리의 정해수옹의 증언에 의하면 예전부터 정감록에 이곳이
만인피난지지라는 말이 전해지면서 일제시대말에 많은 사람들이 이곳으로 몰려들어 정노인이 살고
있는 부락은 현재 5가구인데 당시 이곳에는 무려 30여 가구나 살았다고 한다.
이러한 십승지지류의 풍수이야기는 삽교리 뿐만 아니라 같은 둔내면내의 조항리 동박골에서도
전해져 온다. 정감록에 지금의 조항리 동박골이라는 것이다. 특히 이 마을에는 평안도·경상도에서
이주해 온 집안이 많은데, 이들의 대부분은 바로 그 정감록의 말을 믿고 이곳으로 옮겨왔다고 한다.
6·25전쟁 중에 이웃마을은 북한군이 통과하여 피해가 컸으나 이 마을주민들은 멀리 피난을 가지 않고
마을 뒷산에서 피난 하였다고 하여 더욱 피난지로써 굳게 믿고 있다. 그러나 정검록에는 어느곳에도
횡성 둔내라는 말은 찾을 수 없다.
해방이 되면서 삽교리의 외래 이주자들은 점차 자기 교향이나 도시로 이주하여 갔으며, 특히 이곳에
살고있던 사람들 가운데는 유난히 좌익계열의 농민조합에 적극 가담한 사람들이 많았는데 해방후
서북청년단의 압력으로 대부분 이주하거나 북으로 넘어 갔다고 한다.
이후 이곳의 인구는 이주자에 의한 증가보다는 자연증가에 의해 1970년대 초까지 계속 증가하였다.
강원도 산간마을이 대부분 그러하듯이 이 지역은 화전지대였다. 조사결과 해방직후에 가장 많은
화전이 행해진 것으로 나타났다. 매봉마을의 경우를 보면 해발 900m정도되는 곳까지도 대부분
화전이 행해졌다고 하나 지금은 개천 주변의 비교적 낮은 지대만 전지로 이용되고 있을 뿐이다.
주민들의 전언에 의하면 삽교2리 2반으로 편성되어 있는 이 매봉마을은 현재는 8가구에 불과하지만
가장 호수가 많았을 때는 70여호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 마을의 인구증가로 일제말인 1940년에는
삽교간이학교가 세워지게 되었다. 그 이전에는 일부만 둔내초등학교로 공부하러 다녔고, 대부분
학업을 포기하였다고 하는데, 점차 학동이 늘어나면서 1937년경부터 둔내국민학교에서 파견된 교사가
임시로 시설을 마련하고 학생들을 가르쳤다고 한다. 자료의 멸실로 학교개설 초기의 학생수는 알 수
없고, 625전쟁 이후로는 1972년도에 198명으로 가장 많았으나 이후로는 점차 줄어들어 1996년
3월1일자로 폐교가 되었다.
삽교리는 둔내면 가운데서도 가장 산촌이라고 할 수 있다. 1980년대 이전에는 개천주변의 척박한
논에 벼농사를 짓거나 옥수수·콩·팥·조·귀리 등을 주로 재배하는 전형적인 산간부락이었으나 1970년
중반 영동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점차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고, 특히 1980년부터 고랭지채소
재배가 일반화되면서 이 마을의 대부분의 농가는 고랭지채소가 주요 작물이 되었다.
한편 영동고속도로의 개통을 말미암아 쉼터나 식당·주유소 등 여행자를 위한 편의시설과 아울러
휴양림이나 유스호스텔 같은 관광레저시설도 들어서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긍정적·부정적인 면이
있으나 고속도로의 개설이 둔내면은 물론 이 마을의 전통적 모습을 해체하고 새로운 생활구조 형성을
가속화시킨 것은 분명하다고 하겠다.
삽교리는 현재 3개의 행정리로 구분되어 있으며, 각 행정리는 삽교1리가 4개반, 2리가 5개반, 3리가
2개반으로 구분되어 있으며 각반은 대개 자연부락 단위로 이루어져있다. 또한 삽교리 인구는
1960년대 후반부터 급속히 산업화·도시화가 추진되면서 농촌을 버리고 도시로 향하는 이농현상과
그리고 1960년대말부터 70년대초까지의 화전정리 사업으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타지로 떠났기
때문에 일반적인 농촌마을 보다 그 감소폭이 훨씬 컸다.

3) 삽교리의 이모저모
삽교1리는 삽교3리와 2리 사이 계곡의 남서방향으로 흐르고 있는 계곡천을 끼고 형성된 마을이다.
따라서 가옥은 이 계곡천가나 혹은 이 계곡이 주류하천에 연결되는 지천을 끼고 있는 작은 골짜기에
자리잡고 있다. 마을의 개척자인 안석경이 처음 정착한 곳이 바로 삽교1리의 삽다리라고 부르는
곳이다. 현재 삽교 안석경이 살았던 터에는 정해수옹이 살고 있는데, 현재의 가옥은 이 마을의
전통적인 주거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마을의 중심지는 학교가 자리잡고 있는 노루목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곳에는 학교가 있을 뿐만
아니라 마을회관(창고를 대용)과 소규모 매점이 자리잡고 있고 선바위 마을을 통하여 삽교2리
(영동고속도로 방향)로 나가는 길과 석문리를 거쳐 둔내시장으로 나가는 길, 그리고 삽교1리의 윗쪽
부락으로 이어지는 세갈래 길이 만나는 곳이기도 하다.
삽교1리에는 과거 김해김씨가 많이 살고 있었다. 이에 용물둔지 앞에는 지금 김해김씨의 재실(齋室)이
들어서 있다. 그리고 지금은 없어졌지만 과거에 이곳 세갈래길이 만나는 지점에는 성황당이 자리잡고
있었고, 각 자연부락마다 대부분 별도의 성황당이 있었다. 특히 마당덕의 개울가에는 지금도 제의가
행해지고 있는 전통있는 성황당이 자리잡고 있다. 이곳에서는 음력 3월과 9월 상정일(上丁日)에
서낭제를 지낸다. 현재의 영교분교는 간이학교로 출발하여 정식으로 1950년 국민학교가 되었다가
다시 지난 1989년 분교로 격하되었다가 1996년 3월 1일자로 폐교되었다.
삽교2리는 영동고속도로 주변과 삽교1리로 이어지는 골말, 선바위가 포함된다. 이마을은 청태산
(해발 1,200m) 서쪽 기슭과 자주봉(해발889m)주변에 형성되어 있는 마을로, 마을의 중심지는
삽교쉼터가 있는 맷돌거리라고 할 수 있다.
맷돌거리는 현재 삽교 2리 가운데 가장 호구수가 많은 곳이며, 현재의 삽교주유소 주변은 "당숲"이라
고 하여 성황당이 자리잡고 있던 곳이다. 이 성황당에는 매년 정월에 서낭제가 올려지고, 여름철에는
각 '골'에서 음식을 차려 이곳에 모여 성황당에 공양하고 마을 주민들이 모여 음식을 나누어 먹고
놀았다고 한다. 따라서 이곳은 아주 오래전부터 마을공동체의 중심적인 곳이었다.
특히 골말은 경주김씨가 많이 사는 곳으로 현재 사당이 세워져 있으며, 더덕이 많이 재배되며
토종마을 육성책에 따라 현재 토종닭과 토종돼지 사육이 일부 농가에서 행해지고 있다.
삽교3리는 평창군 봉평으로 넘어가는 6번 국도로 따라가다가 화동리 마을 끝을 지나 우측아래에
위치한 구두미 부락과 화동저수지 동남쪽에 위치한 건중골로 이루어져 있다. 구두미는 태기산 기슭의
비교적 완만한 산록에 자리잡은 부락이며, 건중골은 작은 골짜기를 따라 형성된 부락으로 이 부락의
끝을 지나 작은 고개를 넘으면 바로 삽교1리로 갈 수 있다.

삽교3리는 소생활권으로 볼 때 화동리와 밀접한 마을이다. 도로가 화동리와 연결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인적 물적 교류가 삽교1리 보다는 주로 화동리 주민과 이루어지며, 아동들은 화동리에 있는
덕성국민학교로 취학하고 있다. 삽교리 곧은골(직동)에는 체를 만드는 체방이 있었다.
신중석씨가 1920년대에 시작하여 1950년대까지 지속하였던 체방은 주로 장애인들을 고용하여 만들
었으며, 약 15명 정도 고용하였다. 양평 등지에 분점을 두고 운영하는 등 그 규모가 상당히 컸으며
여기서 만들어진 체는 전국적으로 판매되었는데 주로 행상인을 통하여 전국적으로 보급되었다.
(김진천 임종원씨 증언)
삽교리에서는 대부분 밭농사가 행해지고 있다. 특히 고랭지채소를 비롯한 더덕 인삼등이 주로
재배되고 있다. 또한 삽교리에서는 유학자로 유명한 안삽교를 비롯하여 많은 인재가 배출되었다.
횡성향교유도회 회장을 역임한 김양균, 우광실업(주) 대표이사인 김진천, 감사원에근무한 김택수,
한학자이며 문집 3권이 있는 안석경, 제천시의회 의장을 역임한 최경화, 육군상사로 제대하고
무공훈장을 받은 최종열들이 있다. 이외에도 누락된 분들이 있을 것이다.

◎ 맷돌거리 서낭당
삽교2리의 삽교주유소와 삽교쉼터가 있는 주변 마을이 맷돌거리라고 부르는 자연부락이다. 이곳에는
맷돌거리 뒷산인 자주봉 기슭과 반대편 현재 둔내유스호스텔이 건립된 부근에 맷돌과 흡사한 바위가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부락명이다. 이 마을에는 커다란 서낭당이 하나 있다. 10여년전 까지만 해도
매년 서낭제를 올리고 마을의 잔치가 벌어지던 곳이다. 3년전 도로포장공사를 하면서 서낭도 없애고
당숲도 몇그루의 나무만 남기고 모두 없어졌다. 특히 이곳에는 수백년된 배나무가 있었는데
이 마저도 베어버렸다고 한다. 이 서낭에서는 정월에 택일하여 제사를 지냈고, 여름철에도
(대개 음력6월) 주변의 여러 마을에서 각기 분담하여 음식을 장만하고 이곳에 모여 서낭에 공양하고
마을주민들이 음식을 나누어 먹으며 흥겹게 놀았다고 한다.

◎ 삽교1리 삽다리 서낭당
이 서낭은 삽교1리 옻밭골로 올라가는 입구에 위치하고 있던 서낭이다. 지금은 흔적조차 없어졌지만
20여년전까지만 하더라도 이곳에서는 매년 제의를 지냈다. 제의(致誠)는 정월초에 지내는데, 섣달
그믐이 되면 부락민이 모여 제주(祭主)와 일자를 정하고 즉시로 서낭과 지주집에 금줄을 친다.
제일(祭日)이 되면 모여서 밤새 놀다가 새벽이 되어 닭이 울면 서낭으로 나가 제의를 올렸다고 한다.

◎ 삽교2리 골말 서낭당
골말에는 삽교1리 쪽에서 들어가는 입구와 이곳에서 300여미터 떨어진 두곳에 서낭이 있었다.
주민 김진옥씨의 증언에 의하면 마을 입구쪽에 있는 서낭에는 가까운 주변에 사는 가구
(주로 경주김씨)에서, 윗쪽에 있는 서낭에는 골말부락 전체에서 치성(致誠)을 올렸다고 한다.
제일(祭日)은 정월 초3일이었으며, 제주(祭主)는 대개 돌아가면서 맡는 것이 통례였으나 사주와
일진을 보아서 운수가 나쁜사람은 제주를 맕을 차례라고 하더라도 다른사람으로 교체하였다고 한다.
제주는 대개 1∼3일 전에 부락민이 모여 결정하는데 제주가 정해지면 그 즉시로 금줄을 만들어
서낭과 제주집에 쳤다고 한다. 치성은 삽교1리 매당덕 서낭제와는 달리 날이 저물어 인적이 없을 때
백설기와 간단한 주과포를 준비하여 행하였다. 이 서낭제를 지내는 가운데 가장 나중에 하는
의식이 소지를 올리는 일인데 각 가구마다 가내의 안녕·농사의 풍년을 기원하며 소지를 올려
그 소지제의 올라가는 모양을 보고 가정의 운을 점쳤다. 특히 이곳은 산간 오지마을이기 때문에
과거에는 잦은 호환이 발생한 부락으로 서낭제에서 축원하는 주내용이 풍년과 함께 사람이나 우마가
호환을 당하지 않게 해달라는 것이었다고 전한다.
이곳 서낭도 예외없이 큰 고목아래 설치되었는데 골말입구의 고목은 완전히 없어졌고, 위쪽의
서낭목은 썩은 고목으로 남아있다.
◎ 구두미 서낭당
구두미 마을 맨 안쪽의 개울가 숲속에 위치하고 있다. 지금은 당 자체는 모두 파괴되고 단지 돌을
쌓았던 유지(遺址)만이 남아있다. 이 서낭은 6·25전쟁중에 없어졌다고하는데, 그 이전에는 이곳에서
매년 정월에 서낭제를 지냈다.
섣달에 택일을 하고 일자에 사주를 맞추어 좋은 사람을 제주(祭主)로 선택하고, 제일(祭日)의
보름전쯤에 서낭당 앞에다가 제주(祭酒)로 쓸 술단지를 묻었다가 사용하였다고 한다.
구두미에는 이 서낭당 말고도 구두미 입구쪽으로 1개소가 더 있었다고 한다.

◎ 삽교2리 산신당
부락에서 동북쪽으로 보이는 매봉 아랫쪽에 있었던 것으로 산영지신(山靈之神)과 권대감신(權大監神)
을 모셨다고 한다. 강원도의 서낭신 중에는 실존했던 인물의 신주가 모셔지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
특색이다. 영월의 단종, 고성군 토성면 박천리 서낭신인 장장군(張將軍), 정선군 동면 신월리의
서낭에 모셔진 이 마을 최초의 조상 최씨할아버지. 인제·홍천·횡성의 권(權대)감과 박(朴대)감 등이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삽교2리의 산신당에 권대감을 모시게 된 경위는 분명치 않으나 주민의 말에
의하면 권대감신은 인제·평창·홍천 등지를 다니며 삼을 캐는 심마니들에 의하여 처음 모셔지기 시작
했다고 한다. 권대감신은 홍천군 내면 광원1리, 창촌2리와 인제군 동면 자운리 서낭당에도 모셔지고
있는데 자운리 서낭에서 권대감신을 모시게 된 경위는 다음과 같다.
「조선 세조(世祖)때, 단종(端宗)이 영월로 귀양살이를 가게 되자 나라사람들은 세조의 부당한 처사에
울분을 참지 못했으며, 많은 신하들이 관직을 버리고 귀향하거나 방랑 생활에 들어갔다. 단종의
외숙이 되는 권전(權全)이라는 대감도 한양을 떠나 방랑길에 올랐다. 권대감이 가다가 멈춘 곳이
이곳 자운리. 여기에 정착하기로 한 대감은 계곡가에 초막을 짓고 살았다. 그러던 어느날 권대감은
이웃마을에 다녀오기 위해 말을 타고 떠났다. 산길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사슴 한 마리가 말 앞에
나타났다. 갑작스런 사태에 놀란 말이 치뛰는 바람에 권대감은 그만 말에서 떨어지면서 칡덩쿨에
목이 걸려 죽고 말았다. 그래서 마을사람들은 대감의 영혼을 추도하기 위하여 마을의 주신으로
모시게 되었으며 이지방의 화와 복은 권대감신이 모두 주재하게 되었다고 전한다.」(江原道 民俗誌 )
또 이 권대감제는 지금은 모두 폐지되었으나 인제읍 가아리에서도 마을의 태평을 위하여 춘추로
지냈다고 하며, 홍천군 광원1리의 권대감사당(權大監詞堂)에는 <대광보국숭록대부권대감신위
(大匡輔國崇錄大夫權大監神位)>라고 하는 대감의 구체적인 인적사항을 적은 위패를 모시고 있다고
한다. 이곳에서는 그의 이름이 권존(權尊)이며,한성판윤을 지낸 단종의 외조부로 알려져 있다고 한다.
또 권대감이 칡넝쿨로 인하여 죽었기 때문에 이 지역에는 대감의 신통력 때문에 칡넝쿨이 뻗지
못하게 되었다고 전한다고 한다. 이 권대감에 관한 내용의 일부는 우연인지는 알 수 없으나 삽교리
에서 전해져 오는 안석경에 관한 이야기와 일치한다. 즉 [칡넝쿨]이나 [말]에 관한 이야기는
권대감과 안석경에 관한 이야기가 서로 형태가 같은 것이다.
그 이유는 분명치 않고 어느 것이 원형인지도 확인할 길이 없다. 다만 인제나 홍천에서의 권대감
신앙이 보다 구체적인 것으로 보아 이 지역의 권대감 신앙이 심마니나 기타의 이주자들에 의하여
삽교리로 전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칡넝쿨]과 [말]에 관한 이야기는 삽교리에서도 매우
구체적이고 실제 안석경의 묘가 있고, 또 삽교리에서는 칡넝쿨이 뻗지 못한다는 것은 주민들의
공통된 인식인 것으로 보아 어느쪽이 원형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권대감신이 단종의 외조부가
분명하다면 삽교리의 마을개척사를 고려할 때 명백히 인제 홍천지역에서 전래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안석경 주거터
현재 삽교리(강원도 횡성군 둔내면)를 처음 개척한 인물로 알려져 있는 삽교 안석경이 거주하던 곳
이다. 삽교1리의 가장 안쪽 마을에 해당하는 마당덕으로 가다가 삽다리라고 하는 곳이 있는데 이
마을의 도로변에서 50여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현재는 정해수씨가 살고 있는 곳으로 지금은 약 70여년전에 지어진 목조 토벽건물이 자리잡고
있지만 이 건물을 짓기 전에는 토막집(통나무집)이었다고 한다. 이 집 뒤편에는 약300여년 된 돌배
나무가 있는데, 이 나무는 안석경 거주할 때부터 가꾸어 온 것이라고 한다.

경주김씨 재실
삽교1리에서 골말로 올라가는 입구의 왼편 구릉에 위치하고 있다. 재실 건너편에 거주하고 있는
김진옥씨의 8대조 이하의 선조를 모신 재실로, 1977년 건립되었다. 경주김씨는 삽교리 마을을 개척
한 3대성씨 가운데 하나이며, 특히 일찍부터 지금의 삽교2리 골말에 자리잡았다. 이 때문에 골말은
예부터 경주김씨 집성촌을 이루어 왔으며 지금도 이 마을에는 경주김씨가 가장 많이 살고 있다.
재실은 정면 3간, 측면 2간의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으며, 건물 자체가 문화재적인 가치다 있는 것은
아니나 김해김씨의 재실과 마찬가지로 이 마을의 개척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문화유산이라고
할 수 있다.

◎ 열녀한씨 재실
한치명의 딸인 한씨는 어려서부터 타고난 성품이 착하고 행동이 정숙하였다. 경주김씨 김규선에게
출가하여 시부모에게 효성이 지극하였고 동기간에 우애가 있어 김씨가문을 화목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남편을 극진히 존경하였다. 남편이 우연히 병이들어 자리에 눕자 백방으로 약을 쓰고 후원에
단을 쌓고 하늘에 기도하며 낫기를 빌었으나 얼마후 남편이 사망하였다. 장례를 극진히 치른 다음날
한씨도 물에 빠져 죽었다. 마을 사람들은 한씨를 열녀라고 하였고 이와 같은 사실을 건의하여
1922년 孔夫子聖蹟圖五倫行實重刊所에서 열녀(烈女)로 포상하였다.

◎ 김해김씨 재실
삽교1리 삽다리에서 마당덕 마을로 올라가다가 우측으로 굽이지는 갈림길 옆의 안영필씨가(家) 옆에
위치하고 있다. 김해김씨는 이 마을을 개척한 3대 성씨중의 하나로 현재도 이 마을에 가장 많이
거주하고 있는 성씨이다. 재실은 정면 3간,측면 2간의 팔작지붕 건물로 정남향으로 지어져 있다.
약 20여년전에 건립한 것이라고 하는데, 연대가 오래된 것은 아니나 이 산간마을에 재실이 세워질
수 있었던 것은 김해김씨가 8대를 이어 오며 이마을에 거주한 내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재실은 마을 개척사와 관련이 있는 문화유산인 것이다.

◎ 선바위
"선바위"라는 이 마을의 자연부락명의 유래가 된 바위로 영교분교에서 삽교2리 정류장 방향으로
1㎞가량 가다가 윤영조씨 집 부근의 도로변 산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높이가 약 10여미터에 이르는
이 바위는 윗부분은 다이아몬드형을 옆으로 뉘여 놓은 형태의 넓직한 바위가 올려져 있고 그 위에는
약 40㎝ 정도 된는 불두(佛頭)가 놓여 있다. 바위 아래에는 촛대에 초가 세워져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바위가 신앙의 대상이 되는 곳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곳에는 삽교리 주민뿐만 아니라 이웃
마을이나 타지에서도 치성드리러 온다고 한다. 불두는 15년전 마을 주민이 세운 것이다.

◎ 삽교2리 연자방아
삽교2리 맷돌거리의 삽교쉼터 주차장 옆에 위치하고 있다. 이 연자방아는 본래 이곳에 있던 것이
아니라 골말에서 옮겨온 것이라고 한다. 한쪽의 일부가 파손되어 있다.

4) 삽교리의 지명유래 둔내목차 삽교목차

▷삽교1리
◎ 국적(局敵) : 삽교1리 입구에서 조금 올라가다가 왼편으로 있는 작은 골짜기로 현재 소암목장이
있는 골짜기로 국적산 밑에 있다하여 국적이라고 하였다.
국지기라고도 하며, 한자로는 '菊赤'이라고 포기하기도 함.
◎ 국적산(菊赤山, 局敵山) : 국적의 뒷산으로 태기산 남서쪽의 한 지맥이다.
◎ 노루목<獐項>:삽다리 남서쪽에 있는마을로 지형이 노루목처럼 잘록하게 생겼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두멍소 : 삽교1리에서 골말로 들어가기 전의 큰길 옆의소.
◎ 매당덕 : 마당덕, 혹은 마당(매당)대기, 매당대라고도 함. 혹 한자로 '梅堂德'이라고하나 김호동씨댁
가승보(家承譜)의 기록을 보면 <정곡(庭谷)>이라고 되어 있다.
◎ 바디장골<배양동(培陽洞)> : 삽다리 동북쪽에 있는 마을로 맷돌처럼 생긴 바위한 쌍이 있으며,
바디장수가 살았다고 하여 바디장골이라고 한다고 함.
◎ 사시내곡(四時來谷) : 김호동씨댁에서 영교분교쪽으로 조금 내려오다가 오른쪽으로 있는 골짜기
◎ 삽다리<삽교( 橋)> : 삽교리의 다른 이름.
◎ 삽대리재 : 매당덕에서 평창군 봉평으로 넘어가는 고개. 과거에는 이곳으로 자주 왕래를 하였으나
최근에는 거의 통행하지 않음.
◎ 약물산 : 영교분교에서 석문리 방향으로 조금 내려 오다가 커브길 건너편의 산을 말하는데 예전에
약수(藥水)가 있었다고도 함.
◎ 옻밭골 : 칠전동(漆田洞)이라고도 하며 삽다리 남동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
◎ 용고개 : 석문리에서 삽교리로 진입하는 첫머리에 있는 작은 고개.
◎ 자래골 : 삽교1리 입구에서 국적에 이르는 곳.

▷삽교2리
◎ 가당양지 : 삽교2리 곧은골에 있는 자포저수지의 북서쪽에 있는 작은 골짜기로햇볕이 잘 들어
고지대임에도 불구하고 목화재배가 가능하다고 하는데 명칭도 그와 관련있는
'가장 양지바른 곳'이라는 의미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 가래목 : 둔내터널 부근의 작은매봉 아래쪽.
◎ 곡촌(谷村) : 골말이라고도 하는 삽교2리에 속하는 마을로 삽교1리의 입구에서 영동고속도로 방향
으로 올라가면서 골짜기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음.
◎ 곧은골<直洞> : 맷돌거리 남쪽 곧은 골짜기에 있는 마을.
◎ 너러지 : 자주봉 위에 있는 비교적 평탄한 곳.
◎ 당숲 : 성황당이 자리잡고 있던 곳으로 삽교리에는 맷돌거리의 삽교주유소 앞을 비롯하여 구두미,
골말, 마당덕 등에 이런 이름을 가진 곳이 여러군데 있다.
◎ 대제터골 : 곧은골에 있는 지명으로 김씨묘가 있는 부근이다.
◎ 뒷골 : 둔내터널 옆의 작은 골짜기
◎ 매봉<응봉(鷹峰)> : 매사냥을 했었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 그러나 실제 '매봉'이라는 지명
전국적으로 많이 분포되어 있다. 그 어원은 '뫼<山>'와 '봉<峰>'이 합해서 된 경우가 많다.
◎ 매봉재 : 매봉에서 평창군 봉평면으로 넘어가는 고개(매봉마을 입구쪽에도 있음)
◎ 매봉재 : 삽교2리 맷돌거리에서 매봉마을로 넘어가는 작은고개.
◎ 맷돌거리<마석(磨石)> : 지주봉 선바위 남쪽에 있으며, 옛날에 맷돌처럼 새긴 바위가 있어 맷돌거리
라는 명칭이 생겼으나 현재는 없어졌다.
◎ 맷돌바위 : 맷돌거리 마을에 있는 맷돌처럼 생긴 바위. 마을 명칭은 이 바위명에서 유래하며 이 마을
에는 매봉마을로 넘어가는 작은고개의 왼편 자주봉 골짜기와 삽교쉼터 맞은편 두군데 있었다고
한다. 특히 삽교쉼터 맞은편에 있던 맷돌바위는 아랫 받침석과 윗돌 사이를 또다른 돌이 받치고
있어서 수백킬로그램되는 윗돌을 마치 맷돌처럼 빙빙 돌릴 수 있었다고 함.
◎ 박달골 : 선바위가 있는 뒷편의 골짜기.
◎ 범바위 : 맷돌거리 맞은편 산에 있는 호랑이 형상의 바위. 현재의 둔내유스호스텔 뒷편.
◎ 사태골 : 매봉 마을입구에서 남쪽 방향의 작은 골짜기.
◎ 선바위(立岩) : 노루목과 매봉사이에 서 있는 바위.
◎ 선애재 : 매봉 마을에서 둔내터널 방향으로 있는 작은 고개.
◎ 성틀목이 : 곧은골에 있는 지명.
◎ 자주봉(自主峰) : 맷돌거리, 골말, 선바위 마을의 사이에 있는 해발889m의 봉우리.
마을 사이에 불끈 솟아 있다고 하여 본래 '자지봉'이라고 불렀다고 하는데 후에 발음이 어색하다고
하여 자주봉으로 고쳤다고 한다.
◎ 장당골 : 산바위 맞은편에 있는 골짜기.
◎ 주점터 : 맷돌거리 맞은편에 있는 곳. 주민들은 [주전터]라고 하여 돈을 주조하였다고 하나 그곳에
"6갈보 8건달이 살았다."라고 하는 전언으로 보아 주점터였던 것으로 보인다.
◎ 질골 : 매봉 마을에서 둔내터널로 올라가는 골짜기.
◎ 큰삽다리 : 삽교2리의 지금의 영동고속도로 영동1터널(둔내터널)이 있는 마을로 대 관령 보다 더
높은 곳에 위치해 있다.
◎ 풀목골 : 선바위 뒷쪽에 있는 골짜기.
◎ 하박골 : 선바위 뒷족에 있는 골짜기.

▷ 삽교3리
◎ 갈골 : 구두미 당숲의 건너편 골짜기.
◎ 건중골(健仲谷) : 삽다리 북쪽에 있는 마을
◎ 구두미(龜頭味, 九斗味) : 삽다리 북서쪽에 있는 마을로 거북이 머리와 같이 생겼다 하여 붙여짐.
삽교3리의 태기산 중턱의 마을로 평창군에서 고개길로 둔내로오면 작은 삽다리(양구두미라고
하는 것 중에 소삽다리)가 있는데 삽교선생이 설던 집터가 있어서 지금도 기와장이 발견되며
태기왕(泰岐王)이 전쟁에 패해 이곳으로 피신하였다가 옥새(玉璽)를 버렸다고 함.
◎ 구두미재 : 구두미에서 평창군 봉평면으로 넘어가는 고개.
◎ 단지골 : 건중골에 있는 작은 골짜기로 단지처럼 생겼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
◎ 대바위골 : 허웅다리 윗쪽에 있는 골짜기.
◎ 더렁골 : 대바위골 윗쪽에 있는 골짜기.
◎ 덕산내미골 : 건중골에 있는 작은 골짜기.
◎ 돼지덕골 : 큰 분망골 위에 있는 골짜기로 개별적으로 치성을 드리는 산신당이 있었다고 한다.
◎ 분망골 : 삽교3리 구두미 마을의 당숲이 있는 윗쪽 골짜기로 작은 분망골과 큰분망골이 있음.
◎ 사시나무골 : 건중골 위쪽에 있는 작은 골짜기.
◎ 산제단골 : 건중골 입구에서 남쪽편의 작은 골짜기로 예전에 산제단이 있었다고 함.
◎ 양구두미재 : 구두미 안에 있는 고개로 고개가 두 개임.
◎ 채동림이골 : 건중골에 있는 작은 골짜기로 채동림이라고 하는 사람의 묘가 있다고 함.
◎ 푯대봉 : 건중굴에서 삽교1리로 넘어가는 고개의 왼편 봉우리.
◎ 해당화골 : 삽교3리 구두미 입구에서 아랫쪽마을.
◎ 허웅다리 : 구두미 입구에서 북동쪽에 있는 골짜기.
◎ 화전박골 : 더렁골 윗쪽에 있는 골짜기.




10. 마암리(馬岩里)
1) 마암리의 자연환경
마암리는 둔내면사무소를 중심으로 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동쪽은 석문리, 북쪽은화동리, 서쪽은
갑천면, 동남쪽은 석문리, 서남쪽은 둔방내리와 연접하였다. 태기산에서 발원하는 주천강의 상류가
마암리의 중심부를 관류하면서 그 좌우에 작고 큰 들을 형성하여 일찍부터 농경문화가 발달하였다.
총면적 949.8㏊중에서 밭이 145.2㏊, 논이 94.6㏊ 임야가 65.6㏊, 기타가 47㏊로 둔내면 총면적
14,073㏊의 6.699%를 차지하고 있다. 주천강 상류가 마암리 중앙부를 관유하기 때문에 비교적
농수가 풍부하여 주변의 농토가 기름져서 농경사회에서는 비교적 농업이 잘되는 부유한 마을이다.

2) 마암리의 형성과 변천
마암리에 우리의 조상들이 언제부터 생활하면서 마암리라는 마을을 형성하였는지 기록이 없으므로
자세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주천강 유역에는 이미 수천년 전부터 우리의 조상들이 작은 마을을
형성하고 살았으니 주천강 상류인 마암리에도 이미 수천년전부터 우리의 조상들이 살았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현재 마암리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수천년전에 살았던 씨족들은 아니다.
그들은 이미 어디론가 다른 곳으로 이전해갔고 다른 곳에서 살던 씨족들이 현재 살고 있다.
마암리에 대한 기록은 1759년≪여지도서(與地圖書)≫에서 처음 나오며 이때는 마암리라고 하지 않고
마여미리(馬余味里)라고 하였다. 당시 마여미리에는 33호에 남자 40명, 여자 37명, 총 77명이 거주
하는 비교적 작은 마을이었다. 마을 앞산 중턱에 높이1m, 너비1.5m의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는
말바위라고도 부르는데, 이것에서 마암이라는 이름이 유래하였다.
1914년 지방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화랑골, 솔경지, 돌고개, 더벙마을을 합하여 마암리라고 하였고
현재는 마암1, 2리로 분리되었다. 1리는 45호에 남자 77명, 여자80명 총157명이 거주하고 있고,
마암2리는 58호에 남자 78명, 여자 94명, 총 172명의 인구가 거주하고 있다.

3) 마암리의 이모저모
마암리는 6번국도를 끼고 대략 남북으로 길게 형성되어 있다. 대체로 하마암쪽이 마암1리가 되고,
상마암쪽이 마암2리가 된다. 마암1리는 둔내면 소재지에서 6번 국도를따라 화동리쪽으로 가다보면
먼저 도착하게 되는 곳으로 마을 입구에는 마을 회관이 자리잡고 있고, 큰 골짜기를 따라 형성되어
있다. 마을회관 뒷편 언덕에는 지금도 고목이 서 있는데, 이곳에는 예전에 마을 성황당이 있던
곳으로 지난 1970년대초만 하더라도 마을에서 공동으로 제의를 지냈던 곳이다. 마암2리는
1리에서 화동리쪽으로 더 올라가서 하천의 좌우의 마을이 이에 해당한다. 마을의 중심이 되는
6번 국도변에는 마을회관과 공동농산물 저장창고, 교회 등이 위치하고 있다.
마암리에는 1927년경에 유일의숙(有一義塾)이 있었다. 설립된 시기는 둔내공립보통학교
(屯內公立普通學敎) 인가 이전인데, 당시 지역별로 서당은 있었으나 부유층 자제들이 대부분이었다.
유일의숙은 서당 한문교육이 획일적이고 신문화에 너무 뒤떨어지므로 청소년들에게 신교육문화를
접하게 하여 개화하고 장래의 희망을 열어주고자 하는데 그 취지를 두었다. 처음에는 돌고개마을
개인집에서 10여명 정도 지도하였는데, 뜻있는 인사들이 자산을 희사하여 지금의 마암2리 회관있는
위치에 건물을 짓고 학교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최형재 2만원, 이종헌 1만5천원, 최반식 1만원,
송익수 1천원 외 다수의 인사들이 모금하여 대지와 학교를 짓고 논 50여두락, 임야 수십정도를
구입하여 학교재정을 운영하였다. 당시 지도교사로는 이두병선생이 맨처음 교사로 오셨고, 차동준,
김병두, 김복래,김남준선생이 계셨고, 해방직전에는 최달수, 안수정선생이 계셨다.
6학년까지 학제를 두고 7∼20세까지 연령 제한없이 희망자는 누구나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하였고
전성기에는 학생수가 100여명이 넘는 경우도 있었다. 수업은 국어(한글), 산수(주산), 역사·지리,
도덕의 4과목을 지도하였다. 학생들은 4년을 수료하고 둔내공립보통학교로 전입하였다고 한다.

해방이후 1년정도 유지되었으나 둔내 화동초등학교로 학생들이 흡수되어 폐교되고 건물만 남아
있다가 6·25이후 둔내중학교 설립추진사업에 재산을 희사하고 대지와 임야는 동리 공동재산으로
운영되었다. 또한 1945년경 송와 배진환선생의 제자인 박승열선생이 5년동안 한학을 위주로 학동
들을 지도하였다. 처음에는 마암1리 검두골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학생수가 20여명정도로 확대
되자 학생가정을 1개월씩 순회하면서 서당을 운영하였다. 당시 제자로는 마암1리 지역에 유근주,
신동수, 박상복, 송광익, 한남수, 정창화, 이철용, 정봉환, 송순익등이 있고, 마암2리 지역에 김인수,
김형국, 하용균, 서병국, 최창화, 이강선, 송영익, 정청화 등이 있다. 마암1리 종대거리에서 서쪽으로
약 300m 지점에 성황당이 있었다. 제사는 주로 이기병씨가 주관하였는데, 1970년경에 소멸되었다고
한다. 성황당은 집사인 정태경씨가 관리를 하였고, 매년 음력 10월초에 택일하여 마을의 안녕과
풍농을 기원하였다고 한다. 이 외에도 마암2리에서 봉덕으로 넘어가는 고개에는 성황당이 있었고,
화랑골 입구에 성황당이 위치하였다고 하는데 1968년경에 소멸되었다고 한다.
또한 마암리에서는 육군 3사단 감찰참모인 곽영묵, 둔내면장을 역임한 윤규섭, 봉평면장을 역임하고
민주당시절 국회의원에 당선된 장춘근 등이 있다.

4) 마암리의 지명
◎ 검두골 : 검두재 밑에 있는 마을.
◎ 검두재<마암재> : 마암리에서 갑천면 검두로 넘어가는 고개.
◎ 고물개봉 : 송정 남쪽에 있는 산으로 고물고개처럼 생겼음.
◎ 곧고개<直峴> : 마암리에서 갑천면 절바위로 넘어 가는 고개.
◎ 돌고개<石峴> : 송정 남쪽에 있는 고개.
◎ 돌보 : 송정 앞에 있는 돌로만 막은 보.
◎ 마암고개 : 평촌에서 하마암으로 넘어가는 고개.
◎ 말무데미골 : 송정 서쪽에 있는 마을. 아기장수와 용마의 전설이 있음. 옛날 백씨
집에 장사를 낳았는데 집안을 망칠 우려가 있다고 하여 맷돌로 눌러 죽였다.
그후 백마가 나타나서 삼일 동안 울고 돌아다니다 이곳에서 죽었다고 함.
◎ 맹자월골 : 송정 동쪽에 있는 골짜기로 매우 길다.
◎ 모중안 : 송정 북쪽에 있는 마을.
◎ 바우재 : 석현에서 평촌으로 넘어가는 고개로 바위가 많다 함.
◎ 배나무골 : 돌배나무가 많다하여 붙여진 이름.
◎ 백장골 : 송정 서쪽에 있는 골짜기로 백장수(白將帥)가 낫다 함.
◎ 버덩말<坪村> : 넓은 들이라는 의미로 붙여진 이름.
◎ 샘물보 : 송정 아랫쪽에 있는 보(洑)로 샘물이 많이 나 보가 되었음.
◎ 서낭고개 : 고개에 서낭당이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
◎ 송영지<松亭> : 솔경지라고도 하며 마암리에서 가장 큰 마을.
◎ 종대거리 : 마암리 남서쪽에 있는 마을로 일제때 종대를 세웠던 곳이라 함.
◎ 주막거리 : 송정 남서쪽에 있는 마을로 주막집이 있었다고 함.
◎ 텃골 : 송정 남쪽에 있는 골짜기.
◎ 화랑골 : 송정 동쪽에 있는 마을로 전에 화랑이 살았다 함.

11. 화동리(禾洞里)

1) 화동리의 자연환경
화동리는 둔내면사무소를 기준으로 하여 가장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동쪽은 삽교리, 평창군 봉평면,
북쪽은 홍천군 서면, 서북쪽은 청일면 신대리, 서쪽은 갑천면 고시리, 남쪽은 마암리와 연접해 있다.
북쪽에 우뚝 솟은 태기산(1,261m)은 화동리의 진산(鎭山)으로 화동리를 수호하고 있다. 태기산의
서남쪽 자락에 자리잡은 화동리는 태기산에서 흘러서 주천강 상류를 이루는 화동리 서남쪽에 약간의
들을 이루었을 뿐 농경지가 많이 형성되지 못하였다.면적은 1293,7ha나 되는 넓은 지역이며,
일반적으로 임야가 많고 농경지가 적으며 농경지로는 밭이 많고 논이 적다. 임야는 929ha이고, 밭은
340ha, 논은 70.2ha이며 기타가 57ha로 되어 있다. 둔내면에서 화동리가 차지하는 비중은
면적으로는 9,18%, 인구는 5,9%(280명)를 차지하고 있다.

2) 화동리의 형성과 변천
화동리 지역에 언제부터 사람이 거주하면서 생활하였는지 그 시기는 확실히 알 수 없다. 대체로
인류가 최초로 생활하던 곳은 산과 강이 있던 곳이었고 둔내지역에도 주로 주천강 유역에서 인류가
먼저 생활하였던 것으로 미루어 보아 주천강 원류지역인 화동리에는 주로 산만 있기 때문에 둔내면
중에선 비교적 늦게 사람이 정착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1759년의 사료에 화동리가 기록되어 있고
이시기에 마암리나 석문리보다 많은 인구가 거주하였던 것을 보면 이미 조선전기부터 많은 주민이
생활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화동리라는 명칭은 신라 시조 박혁거세에게 패한 진한(辰韓)의 태기왕(泰岐王)이 이곳으로 피난을
왔는데 수행 군사와 주민들이 식량이 부족하였는데 이때 화동 안골짜기에서 볍씨가 나와 농사를
짓게 된 후부터 볍씨가 나왔다고 하여 벼화(禾)자를 써서 화동리가 되었다고 하고, 또는 괴화나무가
있어서 괴화골이라 했다가 고야골, 화동골이 되었다고도 하기도 하나 모두가 전설로 확실한 것은
알 수 없다. 화동리는 옛날부터 영서주민(진부·봉평·대화)들이 원주 문막 남한강까지 온 소금수송배
에서 소금을 수송하기 위하여 소금장수들이 많이 왕래하던 중간지점으로 주막이 많고 소장수들의
숙소와 마방(소먹이는 집)이 있었던 교통의 요지로 상점과 양조장이 있던 번화한 곳이었다.
화동리는 6·25 발발 직전인 1948∼1949년 사이에 지역의 남로당원과 연결한 무장공비들이 태백산
을 중심으로 남침하여 오대산과 태기산에 침투하여 야간에 산간주민들을 납치, 식량 및 가축약탈
등의 피해가 속출하였다. 이에 국방경비대(8연대)와 전투경찰대가 화동에 주둔하고 수개월에 걸처
소탕작전을 실시하였다. 이 전투로 국군과 경찰의 전사자가 많았고 지금 경찰전적비가 태기산통신
중계소 도로변에 건립되어 있다.
화동리는 1759년 당시 51호에 남자 58명, 여자 59명, 총 117명이 거주하는 마을이었고 1914년
지방행정개혁을 단행할 때에, 방가곡, 정문거리, 무사골, 버덩마을, 고시곡을 합하여 화동리라 하였다.
1995년 현재 1, 2리로 분리되어 있다. 1리는 47호에 남자 71명, 여자 73명, 총144명이 거주하고,
2리에는 47호에 남자 67명, 여자75명, 총 142명이 거주하는 마을이다.

3) 화동리의 이모저모
화동리는 6번국도와 주천강의 시원이 되는 개천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다. 마을회관을 비롯한
덕성초등학교, 화동교회 등이 국도변이나 인접한 마을 입구에 자리잡고 있으며 화동2리의 정문거리
에는 순흥안씨집안의 안광근효자각이 있고, 그 윗쪽에는 화동저수지가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각 부락마다 성황당이 있었으나 지금은 화동 2리에 한곳만이 형태를 보전하고 있고 나머지는
모두 없어졌다. 남아 있는 한곳도 지금은 보살피지 않고 방치되어있는 상태이다. 화동1리 고시곡의
마을회관이 있는 곳은 예전부터 마을의 입구이면서 신앙적 대상이 되는 곳이었다. 현재 이곳에는
200여년된 느티나무가 서 있고, 지금은 흔적이 없어졌지만 그 좌측에는 성황당이 있었다.
그리고 그 우측에는 '거북바위'라고 부르는 바위가 있는데, 그생김새가 거북이 형상과 아주 유사하다.
거북바위 머릿쪽 윗 마을에 부자가 살았는데, 손님이 많이 찾아들어 그집 안주인이 손님대접이
힘들어 고심하던 중 탁발하러온 스님에게 부탁하였더니 스님이 거북바위 목을 잘라버리어 피가
나온 후 집안이 차츰 쇠퇴하여져 손님이 끊겼다는 전설이 있다.

그리고 화동1리 고시곡은 본래 강릉김씨 집안의 집성촌이었기 때문에 주변에는 강릉김씨 집안의
묘가 많이 있다. 특히 둔내에 처음 이주한 강릉김씨 형제의 묘가 있는데,이 가운데 동생의 묘와
관련하여 전설이 전해져 오고 있다. 이 묘의 주인이 죽자 집안에서는 지관을 불러 묘자리를 잡고
장례 일시를 정하게 되었는데, 지관이 다른 것은다 정하였으나 하관시간을 말해주지 않았다.
이에 상주가 "지관님! 어찌하여 하관시간을 말씀해 주시지 않는지요" 하였더니 "시간은 묻지말고
장례 당일 하관 준비를 마치고, 묘 앞으로 쇠갓에 붉은 행전을 차고 지나가는 이가 있으면
하관시기오" 하였다. 이윽고 장례일이 되어 장지로 가서 하관준비를 마치고 아무리 기다려도
지관이 말한 쇠갓에 붉은 행전을 찬 이는 지나가지 않았다. 오시쯤 되니 갑자기 천둥, 번개가 치며
장대비가 쏟아졌다. 상주를 비롯한 조문객들은 난감해졌다. 혹 지관이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하여
골탕먹이는 것은 아닌가 의심하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산너머 마을인 무사골에서 어떤 여인이
솥뚜껑을 쓰고 장지 앞을 지나갔다. 가만히 살펴보니 비를 가릴만한 것이 없자 솥뚜껑으로 머리를
가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에 상주는 바로 저것이구나 하고 하관을 하였다고 한다.
솥뚜껑은 다름아닌 쇠갓이요, 아무것도 가리지 않은 맨종아리는 붉은 행전이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이 집안에서 대대로 인물이 배출되었다고 전한다.
그리고 화동1리 마을 회관 앞에는 일생을 근검절약하며 지낸 김재선씨가 마을차고 부지와 민방위
장비 구비에 사재를 희사하여 주민들이 뜻을 모아 세운 송덕비가 있다.
또한 화동리에서는 횡성경찰서 경무과장인 김기준, 육군소령인 박우영 등의 인재가 배출되었다.

4) 화동리의 지명
◎ 가마소 : 가마처럼 생긴 소라 하여 붙여진 이름.
◎ 거북바위 : 화동1리 속칭 고시곡 마을의 입구에 높이 30㎝,길이 1m, 너비60㎝의
바위가 서있다. 지금은 이 바위의 목부분이 잘리어 있다.
◎ 고시곡 : 평촌 서쪽에 있는 마을로 청일면 고시로 넘어가는 고개 밑에 있음.
◎ 괴화곡(槐花谷) : 화동2리1반에 과화곡이란 골짜기가 있는데, 밀주감시원이 나와도 이곳만은
들어오지 않아 농주를 마음놓고 담갔다가 전설이 있다.
◎ 까끈재<削峴> : 괴화곡에서 청일면 신대리 송덕사쪽으로 넘어가는 고개로 매우 험해 깎아 지른 듯
하다고하여 까끈재라고 한다.
◎ 꽃밭머리 : 평촌 서쪽에 있는 마을.
◎ 당개들 : 서낭당이 있던 들.
◎ 무사곡 : 고시곡과 점말 사이에 있는 골짜기 마을.
◎ 방가곡(芳佳谷) : 방가골이라고도 하며 평촌 북쪽에 있는 마을.
◎ 벌아우 : 평촌 동쪽에 있는 마을.
◎ 서우개 : 화동리 평촌 남쪽으로 석문리로 통하는 고개마을.
◎ 솟대배기 : 한씨가 벼슬하여 솟대를 세웠다. 화동리 첫입구 길가에 위치하고 있다.
◎ 왜갈봉 : 평촌 북쪽에 있는 산.
◎ 점말 : 점촌이라고도 하며 옹기점이 있었는데서 유래. 검은 점토로 토기로 만들던
곳으로 6·25직전까지도 옹기가마와 기구가 있었음.
◎ 정문거리 : 화동리 남쪽에 있는 마을로 안광근의 정문이 있는데서 우래.
◎ 진등 : 평촌 남쪽에서 서쪽산등성이에 위치한 마을. 길게 늘어있는 산등이라 하여
진등이라 함.
◎ 평촌 : 정문거리 남쪽 버덩에 있는 마을.



12. 궁종리(弓宗里)

1) 궁종리의 자연환경
궁종리는 둔내면사무소를 기준으로 하여 서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동남쪽으로는 현천리, 북쪽으로는
갑천면 상대리, 서남쪽으로는 우천면 하궁리에 접해 있으며 둔내면사무소에서 가장 서쪽에 위치하고
있는 리이다. 남으로는 봉화산(500m),서북으로는 죽림산(640m), 북으로는 숫돌봉, 동으로는
둔지봉으로 둘러싸여 해발600m이상 되는 고지대에 위치한 마을이다. 총 면적은 456.2㏊로 이중에서
밭이 89.1㏊, 논이 11㏊, 임야가 329㏊, 기타가 27.1㏊로 된 둔내면 총면적14,073㏊중에서 3.24%를
차지하는 가장 작은 리이다.
궁종리(활마루)는 예로부터 마을의 관문인 급경사면의 황아재(黃牛嶺)를 지나 해발 600m 정상에
오르면 산상의 고원 평지에 촌락을 이루고 있는 마을로서 활같이 꼬불꼬불하게 생긴 곳을 지난다고
해서 궁종리라는 이름이 지어졌다고도 하고, 태기왕이 군사들을 훈련하던 활터로 사용한데서
연유되었다고도 하나 후대에 추측에 의한 것으로 정확한 기록이나 흔적을 찾아 볼 수 없다.

2) 궁종리의 형성과 변천
궁종리에 인류가 생활하게 된 것이 언제부터이며 몇 가구가 살았는지는 자세히 알수 없으나 전해
오는 바로는 《정감록(鄭鑑錄)》비결(秘訣)에 궁궁을을지간(弓弓乙乙之間)에 피난처가 있다고 하여
은신처를 찾아 평안도, 황해도를 비롯하여 전국각처에서 사람들이 찾아 와서 터를 잡고 살고 있다.
6·25 당시에도 거의 피해를 보지 않았고 다만 인민군들이 후퇴할 때 퇴로로서 지나갔을 뿐이며,
때로는 사정들은 다르지만 피난자들도 많이 머물다 가곤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횡성현 정곡면(井谷面) 궁종리로서 영조35년(1759)에 발간된≪여지도서(與地圖書)≫에
의하면 가구수 53호에 남자 57명, 여자 59명이 거주한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한일합방후 일제시대
에는 정곡면 상궁종리(현 궁종리)와 하궁종리(현 우천면 하궁리)로 분동이 되었다.
1937년 4월 6일로 정곡면을 안흥면(安興面)으로 개칭함에 따라 궁종리는 자연히 안흥면 소속이
되었다. 1973년 3월 12일 공포된 대통령령제6242호 행정구역 관할 조정에 따라 동년 7월1일부로
둔내면 궁종리로 편성되게 되었다. 산상에 형성되어진 고원형의 전통적인 산간 농촌형 마을로
특별한 성씨의 씨족사회는 이루지 못하였으나 대체로 申,朴,金,李,孟,元,方,王,張,沈,禹,孫,林,洪,柳,陳,
郭씨 등 각 씨족이 생활하였으며, 윗마을 아랫마을이 3개반으로서 마을이번창할 때는 약 50여호가
살았다. 지금은 산업화와 이농현상으로 24가구 65명이 거주하고 있다. 5·16 전후까지는 화전에
의존도가 높았으나 지금은 고랭지채소와 특용작물 축산업 등으로 높은 소득을 올리고 있다.
교통은 도로 사정과 교통수단이 취약하였고 횡성과 둔내로 이어지는 자동차도로가 개통되기
이전에는 소금 등 생활 필수품을 구하기 위하여 원주군 문막 등지의 배말까지 등짐을 지고
걸어다녔으며 횡성에서 둔내로 이어지는 6번 국도가 석명선 횡성군수 재직 시기에 개설된 후 6·25
를 전후하여는 1일 1회의 버스가 다녔다. 진구비에서 마을로 이어지는 길은 오솔길뿐이었던 것을
5·16 후 재건국민운동 당시마을의 벌채목을 나르기 위하여 임시로 개설한 도로를 1967년 양곡2톤을
지원받아 확장 보수하여 1973년 6월21일 진구비에서 칠송(七松)백이 현천리 경계까지 마을을
관통하는 농로 4.5㎞를 완성하였으며 이 도로는 현천리와 연결되어 물자 수송은 물론 생활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오개 되었다.
1989년도만 하더라도 31세대 111명(남 50명, 여 61명)이 거주하였으나 1996년 현재에는 25세대
67명(남 31명, 여 36명)이 거주한다.

3) 궁종리의 이모저모
(1)산업
농업 : 원시적인 영농방식으로 경영하던 중 첨단산업발전에 의한 종자개량 등으로 영농수입은
증가되었다. 그러나 공업화 정책에 따라 농촌인구의 대부분의 도시로 진출하면서 농촌노동력의
고령화가 가속화되어 전체적인 인력부족현상이 발생하면서 산곡간(山谷間)의 전답은 황폐지경에
이르고 있다.
양잠(養蠶) : 양잠은 1940년대로부터 1970년대까지만 해도 농가의 부업으로 한 몫을 차지하고
있었으며 궁종리에서도 양잠농가가 10∼20가구가 있다. 그러나 근래에 와서는 찾아보기 힘든
형편이다. 그 이유로는 과거에는 농약이 아니라 퇴비를 사용하여 농사를 지었으나 근래에는 모든
작물이 농약없이는 수확이 불가능한 상황인데 대부분의 상전이 전용상전이 아닌 논밭두렁에 심어져
있는 것이기 때문에 농약을 피할수 없을 뿐 아니라 전체적인 경쟁력 약화로 인하여 타작물 재배에
밀려 거의 자취를감춘 형편이다.
원예(園藝) : 궁종리는 고랭지채소로 무·배추·풋고추·감자 들을 하고 있으나 궁종리 지역은 교통이
불편하고 오지이기 때문에 채소는 대부분 상인들에게 밭으로 매각되고 있으며, 고추 등 기타 작물은
농협공동출하에 의존하고 있으나 때에 따라서 주민들이 합동으로 가락동 농산물시장으로 출하하기도
한다.
축산 : 98년에는 농가 30호중 한농가당 한우 1두를 사육하는 정도이며 그중 낙농가도 3호가 있어
젖소가 60두정도 사육하였다. 1996년 현재 궁종리에는 한우 94두,젖소 91두, 돼지 400두가
사육되고 있다.
산채재배 : 둔내에서 재배되고 있는 산채로는 곰취가 있는데, 둔내곰취는 궁종리1번지에 거주하는
원종근씨가 울밑에서 자생하는 곰취를 발견, 분주 이식에 성공하면서 시작되었다.
원종근씨는 곰취의 맛과 특성을 연구하여 1989년 농총진흥청으로부터 소득개발작목으로서의
그 우수성을 인정받다 둔내곰취라는 이름으로 본격적인 재배가 시작하였다. 현재는 7개 농가에서
3,500평 규모로 재배되고 있으며 소득은 평당 15,000원 정도이다.

(2) 교육
교육의 여건은 미약하였지만 마을에서 박창의 훈장(朴昌義 訓長)이 1913년경에 처음으로 서당을
열어 약 10여년간 한학을 지도하였고 신태선∼신창선∼안성순∼서하 이병현 선생이 1962년부터
71년까지 9년간 지도하였으며 교육비로는 이병현 선생때는 1년에 쌀 5말씩을 지불하였다.
근대 학교교육은 횡성보통학교와 안흥보통학교를 다니기도 하였고 1929년 둔내보통학교가 개교되어
신호수, 신태영,이진용이 4년 과정을 1회로 졸업을 하였고 그후로 여러 명의 학생들이 둔내를
다니다 정금초등학교로 다시 현천초등학교가 1942년 5월 1일 개교되어 학군이 변경되어 통학하게
되었다. 그밖에 이완섭이 심상선의 집에 재건중학교를 설립하여 곽대근과 함께 지도를 하였으나
여러 가지 사정으로 1년여만에 문을 닫았다.

(3) 종교
종교는 마을이 특정한 종교 집단이 형성되지 않고 대부분 유교적 윤리관으로 조상을 숭배하고 상부
상조하며 살아왔으며 갑천면과 경계인 점고개(店村)에 있는 성황당에는 1년에 한 번씩 정월에 택일
하여 치성을 드렸으나 새마을운동 이후 없어졌으며 지금은 약 200여년된 돌배나무가 성황당 터를
지키고 있다. 마을 중심부에 있는 교회는 해방 전 대동아전쟁 당시 기독교(장로교)도인 함경도출신
신휘균(申諱均)이 가족과 함께 피난 겸 이주해 와 현재의 교회 아래 초가에 살면서 다른 지역의 각
교회로부터 성금을 지원 받아 현 위치에 건물을 지었으며 해방직후 그는 경기도로 이주해 갔고
그후 동네 교인인 장명옥의 헌신적인 노력과 부녀자들에 의하여 유지 관리되어 오다가 80년대부터
감리교로 변경되고 여러 명의 전도사가 부임하여 활동하고 있다. 지금도 대부분 부녀자들로 현 거주
세대의 약40%가 교회에 다니고 있다.


(4) 풍속
관혼상제는 윗마을과 아랫마을로 분리 유학계(儒學契)를 조직하여 상부상조하였으며 당시
혼례(婚禮)에 사용하던 가마는 훼손되어 없어졌고 모든 예식은 현대화되었으며 상례(喪禮)는 아직도
전통적인 방법에 의하여 치러지고 있다. 또한 해방 직후 마련하였던 사물은 마을의 행사나 두레를
할 때 사용하였으나 6·25때 인민군에 의하여 소실되었다. 대동회는 매년말 좋은 날을 잡아 이장집에
모여서 하며 가구당 이장, 반장 몫으로 각 쌀 1말씩을 모아서 주고 있다.

(5) 기타
◎ 대장간 : 1940년경에 박인선이 자기집 앞에 마련하였고 본동을 물론 일근지역까지 알려져 사소한
농기구 및 생활도구를 만들어 쓰다 현대화에 밀려 1975년 3월 농로개설과 함께 소멸되어졌다.
◎ 방앗간 : 디딜방아는 웬만한 집에는 다 있었지만 원동기에 의한 현대식 기계 방아가 없어 추수가
끝나면 현천이나 정금에서 기계를 가지고 와 찧어 주고 갔으나 1954년 심상선이 디젤동력에 의한
현대식 방아를 구입해 와 시설함으로서 커다란 불편을 해소하였고 한때는 원가 절감을 위해 목탄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그후 신광수∼이상순∼홍기창으로 소유권이 옮겨갔으며 홍기창이 1974년에
이사함에 따라 없어지고 말았다.
마을회관 옆에 남아 있던 연자방아 한쪽은 깨서 다른 용도로 쓰였고, 또 다른 방아의 한쪽은
심철섭의 집터와 이완섭의 집앞에 남아 있다.
◎우로정(雨露亭) : 마을 입구인 진구비에 세워진 정자로 1978년에 원주 태창운수 안택승사장에게
기와 비용 20,000원을 지원받다 심상선, 심홍섭 목수와 주민에 의하여 건축하였고 1991년 11월
원목 운반 차량에 의하여 훼손되어 1992년에 박종대 목수가 복원하였다. 정자 옆에는 이완섭이
24세부터 20년간 재건 운동과 새마을운동으로 마을에 봉사한 기념으로 1980년 4월 5일에
느티나무를 식수하였다.
◎ 전기 : 1978년 4월 10일 가설 점화식
◎ 전화 : 1987년 4월 30일 개인 전화 개통식
◎ 범죄 없는 마을 : 1991년과 1995∼1996년도 3차에 걸쳐 지정되었고 법무부장관의 표창을 받음.
둔내면에서 가장 작은 마을인 궁종리에서 많은 인물이 배출되었다. 재무부 국유재산 과장을 역임한
김남중, 육군 중령을 역임한 김동석, 쌍용자동차 원주지점 영월지소 소장인 김동찬, 횡성경찰서
경사인 김정남, 코리아제록스 원주지점 지점장인 맹성래, 경기도 혜인학교 교장인 신광수, 평창군
계촌초등학교 교장인 신기수, 원주시 부론고등학교 교감을 역임한 신길수, 아시아자동차 원주지점
대형부 소장인 신우균, 삼성자동차총무부 부장인 신이균, 강원대학교 예술대학 미술학과 교수인
신철균, 안흥면 정금출장소 초대소장과 횡성향교장을 역임한 신호수, 둔내 단위농업협동조합 상무인
신흥균, 부이사관을 역임한 이명섭, 서당훈장 한학자인 이병현, 새마을중앙연수원강사를 역임한
이완섭, 신화섬유공업사 사장인 옥두창, 서울 면목8동 동장인 정호태 등이 있다.
또한 궁종리에는 열녀와 효자도 있었다. 열녀 김씨는 신양선의 부인으로 남편이 42세에 병중으로
운명지경에 이르자 애통함을 금치 못하여 자기 왼쪽 무명지를 단지하여 남편에게 유혈구(流血口)
하였으나 애석하게 환자는 회복되지 못하고 운명을 달리하였지만 동리사람들이 후세에 귀감이 될
만한 열녀라 하였다. 또한 효자 김응제는 상처한 몸으로 반신불수가 된 노모와 일남일녀의 가장으로
서 날품을 팔아서 생계를 유지하는 빈한한 생활을 하면서 날품을 팔고 돌아올때는 자기가 먹을 저녁
밥을 안먹거나 주인집에서 얻어다가 어머니를 봉양하는 등 병든 노모를 극진히 봉양하여
동네사람들이 후세에 귀감이 될만한 효자라고 칭송하였다.

4) 마을의 지명
◎ 둔지봉(屯之峰) : 이 산은 과거 리유림(里有林) 이었으나 일제시대 말엽 모든 산이 그랬듯이 이 산도
도벌로 인하여 황폐화되자 당시 구장이던 신성선이 주민에게 연간 콩 소두 1말씩 거출하여 산림
순시원을 지명하여 보수로 주며 산림을 보호하여 오다가 일제말엽 모든 리 유림은 면유림(面有林)
으로, 해방후에는 군유림(郡有林)으로 편입되었으며 1976년도에 공매되어 지금은 개인 소유로
되었다.
◎ 멧(뫼)마당 : 마을회관 뒷산 언덕에 200여평 정도를 마당처럼 닦아 놓은 곳으로 대동아전쟁당시
매월 1일 아침 국민선서 궁성 요배를 하던 곳으로 해방 이후에는 초등학교 어린이들의 애향단 모임
장소로 놀이터로 또 마을 체육대회 등 모임의 장소로 쓰였다.
◎ 봉화산<烽火山, 貸付山> : 조선시대 봉화를 올리던 곳으로 봉화산이라 하며 을종(乙種) 국유림으로
일제시대에 총독부에서 산 주변의 주민 즉 안흥면 소사리, 둔내면 현천리, 궁종리, 우천면 하궁리
일부 주민에게 시한부로 대부를 하여 주자 주민들이 봉화산 대부계(貸付契)를 만들어 화전민에게
도조를 부과하여 그 수입으로 연부금을 총독부에 납부하여 오다가 해방후 계원 총의에 의하여 계원
각자에게 분배하였으므로 대부산이리고도 한다.
◎ 석물(石物)등 : 궁종리 2반과 3반의 경계가 되는 능선으로 현 도로의 아래쪽으로 산소
(장씨묘라고 함)에 석물(文人像, 碑座, 床石이 지금도 있음)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 숫돌봉 : 현천리와 갑천면 하대리의 경계가 되는 곳에 있는 산봉우리이며 숫돌이 나와서
일컬어졌다고 한다.
◎ 장구봉 : 장수혈이 있다고도하고 장구같이 생겼다고도 하는 산봉우리로 그유래는 정확히 알 수 없다.
◎ 점고개(店村) : 갑천면 하대리와 궁종리의 경계를 이루는 주막거리 뒤편에 위치하고 있으며 성황당이
있던 곳으로 지금은 성황당은 없어지고 그 자리에 돌배나무만서 있다. 점촌에는 4∼5호의 가구가
살고 있으며 행정상으로는 갑천면 하대리이나 여러가지 여건으로 궁종리와 가까워 두레를 포함하여
모든 일에서 한마을로 여기며 같이 생활하였다.
◎ 진구비<무레올, 長谷川> : 6번국도가 지나며 리간도로와 만나는곳으로 계곡이 깊어서 이르는 곳이다.
◎ 진등 : 긴등이라고도 부르며 둔내면과 우천면의 경계를 이루는 기다란 산 능선으로서 이 능선은
매일재∼덧재로 하여 안흥면 소재지까지 연결되어 있다.
◎ 칠송(七松)배기 : 현천리와 통하는 길목으로 궁종리와는 경계를 이루는 곳으로 일곱 가지로 치켜
올라간 수 아람 되는 커다란 소나무가 길 가운데 있어 마을 사람들의 휴식처로 어린이들의 놀이터로
놀았으나 1940년경에 벼락 맞아 없어졌지만 지금도 일곱 가지의 소나무가 있던 곳이라 칠송배기라
부른다.
◎ 표대봉 : 죽림산에 일제시대부터 국토측량을 위하여 소삼각점(小三角点)을 표시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지금은 건설 교통부에서 세운 표석이 있고 대숲(竹林)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 호랑바위 : 죽림산 정상에서 남서 방향으로 약500m 떨어진 곳에 있는 바위로 현재 이완섭 소유의
밭에 집이 있었고 그 집마당에서 여인네가 물레질을 하는데 호랑이가 와서 여인을 물고가 먹은
바위라 하여 이름지어 졌으며 먹다 남은 시신을 묻었다고 하는 묘가 밭가운데 있었으나 경지정리를
하며 정호상과 이완섭이 묘를 파 보았으나 아무 흔적도 없어 없애버렸다.
◎ 황아재(黃牛嶺) : 우천면 하궁리에서 궁종리 아랫마을로 통하는 관문이며 마을에 이르는 가장 빠른
길이었으나 마을 농로가 개설된 후 다니는 사람이 없어 지금은 흔적만 남아 있다.

명승지와 여가시설

1. 개설 및 둔내십일경
명승지란 일반적으로 경치가 빼어나게 아름다운 곳을 말한다. 이것을 구체적으로 말하면, 저명한
건물이 있는 경승지,원지,폭포,호소,해안,하안,도서등의 경승지,또는 저명한 풍경의 잔망지, 특색 있는
산악, 구릉,고원,평원,하천,화산,온천지 등을 말한다.
우리나라는 자연 자체가 산자수려하여 도처에 명승지가 있어 삼천리 금수강산이라고 하였다.
둔내에도 태기산을 비롯하여 삽교리,마암리,화동리,석문리,둔방내리,자포리,우원리,우용리,현천리,
조항리 등 천연 그대로의 자연 경치와 사계절에 따라서 변천하는 아른다운 경관들이많다.
일찍부터 둔내의 자연과 풍경을 아끼고 사랑하는 시인 문인들이 둔내면십일경을 시로읊은 것이 있다.
둔내지방이 비록 산간 벽지로 옛날에는 교통이 불편한 한적한 산촌에 불과하였으나, 안삽교를
비롯하여 많은 지식인들이 기거하였고 일제의 식민지정책 하에서 우리의 전통 교육을 말살하고
신식교육을 강요하던 1930년대에 둔내를 사랑하고 아끼는 지식인들이 모여 전통 학문의 하나인
시문을 공부하고 친목을 도모하는 시회가 있었다. 즉 1937년 둔내면 영호리 주병황선생, 둔내면
둔방내리 강흥길선생, 둔내면 현천리 김복래선생 등이 주축이 되어 둔내면 11개리의 지명과
자연환경을 관찰하고 11개리의 특색 있는 것을 하나씩 골라 둔내명승지 11개를 선정하고
둔내11경이라고 하였고, 시회를 열어 명승지에 대한 시를 지었다. 30여명이 모여 시를 지었는데
영랑리의 송암 안운담선생의 시가 장원하였다. 면단위 지역에서 마을마다 빼어난 명승지를 정한다는
것도 어려운 일이거니와 여기에 대한 한문시를 남겼으니 둔내면이 문인의 고장이라고 자랑하여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필자의 과문의 탓이겠지만 대한민국 어느 면에도 이와 같은 마을 단위로 명승
지를 정하고 시문을 남긴 것은 없을 것이다. 둔내 11경의 시문 또한 명문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이 시회에서 결정한 둔내 11경에 대해서는 제11장의 각리에 제시하였으므로 본장에서는 생략하였다.
이와 같은 학문의 뿌리가 있었기에 비교적 둔내면에는 학자가 많이 배출되었고 또한 현대 교육에
밀려 한학이 그 자취를 간춘지 오래나 둔내에는 한학이 전통을 유지하고 있다. 영랑리의 송인석옹이
1996년 10월 27일 성균관에서 열린 제3회 알성과거대전에 응시하여 전국에서 구름같이 몰린 200
여명의 응시자중에서 차하급제를 한것도 이와 같은 뿌리가 있기 때문이다. 둔내에는 이것 이외에
여러곳에 명승지가 있다. 그것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2. 태기산
둔내면의 동북쬭에 위치한 1,261m의 태기산은 둔내면의 부산이며 또 모산이라고 할 수 있는
명산이다. 둔내면은 태기산의 동남쪽 자락에 자리잡고 있고 높고 낮은 산들이나 길고 짧은 강,
그리고 넓고 좁은 들판들은 모두 태기산의 준령을 주맥으로 하여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원래의 명칭은 덕고산이었으나 태기왕이 이 산에서 항전하였다고 하여 인근 주민들이 태기산이라고
부르기 때문에 공공기관에서 제작하는 지도에도 태기산이라고 기록되었다.
태기산의 동쪽으로 흐르는 수계는 무이르를 지나 평창강으로 유입되고 서쪽으로 흐르는 수계는
유동천과 합류하여 계천으로 흘러가며 남쪽으로 흐르는 수계는 바로 둔내면의 삽교리,마암리,
석문리를지나면서 주천강의 상류를 이룬다. 시인묵객들이 둔내면의 경치좋은 곳 11개곳을 골라
"둔내11경"을 설정할 때 태기백운이라고 하였거니와 태기산 정상에서 뭉실뭉실 떠가는 구름,
때로는 빠르게 때로는 느리게 뭉쳤다. 흩어졌다. 하면서 기괴한 형상을 수시로 만드는 광경은
참으로 신기하다. 그 오묘한 자연의 조화는 인간으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아름다운 광경이다.

3. 석문암
둔내면 석문리에 가면에 작은 골짜기 입구에 높이 20m 가량되는 바위가 마치 문처럼 양쪽으로
서 있다. 이곳에는 가장 안쪽에 가장 높고 웅장한 것문모양의 바위가 형성되어 있고, 이곳에
이르기 전에 작은 골짜기 마다 모두 골짜기 입구에 암석이 문처럼 되어 있어 이것을 1문,2문,3문,
4문,5문이라고 순서대로 부른다고 한다. 석문리라는 마을 명칭도 이 바위에서 유래하며, 이곳은
매년 봄·가을이면 각급학교의 소풍장소로 활용되고 있는데 1문에서 4문까지 빠져나가면 대학진학
및 사회진출에 대성한다는 전설이 있어 이곳을 찾는 학생들은 장래를 기원하며 4개의 문을 오르고
있다고 한다.



4. 선유암소
석문리에서 삽교리쪽으로 들어가는 입구의 용고개 북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시내바닥의 약150여미터
정도가 온통 바위로 이루어져 있고, 그 위로 맑은 물이 흐르고 있다. 예로부터 경관이 좋아 신선이
하늘에서 내려와 놀았던 바위와 고라는 뜻으로 선유암소라고 하였다. 특히 적별에 철쭉이 만발한
봄철 경관이 최고로 꼽힌다. 봄철에 학생들이 소풍을 많이 온다.

5.낙수대
낙수대 폭포는 화동리 태기산 중턱에 있는 자연폭포로 높이가 10여미터이며 물이 맑고 차다.
폭포의 수원지는 평창군과 분수령이 되는 태기산 정상에서 흘러 내리는 성골물이다.
옛날 이 폭포의 깊이는 10m가 넘었다 하나 지금은 돌과 모래가 쌓여 한길 정도의 깊이 밖에 되지
않는다. 이곳에 희귀어종인 열목어가 서식했으나 멸종되었고, 붕어와 피라미가 서식한다.
예날 태기궁이 있을 때에는 귀족들의 낚시터 였다고 한다.
낙수대 옆에 있는공지는 낙수암 절터이고 그 옆에 연고를 모르는 분묘가 있는데 이 묘의 금초를
제일 먼저 해주는 사람에게는 좋은 일이 이루어 진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