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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순의 생활의 발견

사과박스가 소중하던그시절

by -한우물 2008. 5. 4.

지금은 일상생활에서 가장 흔하게 있고, 소용처도 없어 분리수거의 대상인 종이박스가 한때는 귀하게 대접받는 그런 시절이 있었다. 이삿짐을 준비하는데 필수품이었던 사과박스를  아끼고 보관하던 시절이 있었다. 이사를 마치고 난 뒤에도 사과박스는 짐을 보관하는 서랍장이 되었고, 또 기약도 없는 다음 이사 때에 사용하려고 고이고이 접어 집안 한켠에 보관 하였던 기억이 난다.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말이지만 예전엔 ‘보루박꾸’라고 불렀다. 일제 식민지 영향으로 어르신들이 하는 영어단어의 일본식 발음을 우리들이 그대로 사용했었다. 영어로 보드박스는 골판지상자를 가리키는 말이었는데 통상 지금의 사과상자 같은 것이었다.

추석을 바로 앞두고 신문사 사무실을 이전하면서 이삿짐센터에 포장이사를 부탁하였다. 덩치 큰 책상이며 의자 등 가구비품은 빼놓고 일꾼 몇 명이서 책이며, 집기며, 잡동사니들을 플라스틱 바구니에다 쓸어 담았다. 4층에 있었던 물건들이 사다리차를 이용해 순식간에 1층으로 내려왔다. 예전 같으면 일일이 계단으로 나르는 게 보통일이 아니어서 땀으로 범벅된 얼굴을 훔치어내면서 할 일이었고, 덩치가 큰 서랍장은 두 서너 명이 붙어서 좁은 계단을 이리저리 피해 움직이다 귀퉁이 한 두 군데는 벽에 부딛쳐 흠집이 나기 마련이었다. 가을비 부실부실 내리는 날인데도 박스형 짐차에 실어 비에 젖지 않고 편하게 이사했다. 

얼마나 세상이 편해지었는가?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들이 빠른 시간에 커다란 변화를 맞이하는 것이다.

예전에는 이사를 간다면 집안의 큰 행사로 대대적인 이사준비가 시작된다. 며칠 전부터 구멍가게에 미리 부탁해 사과박스를 필요한 양만큼 모아지기를 기다렸다. 지금처럼 한단으로 과일이 포장된 것이 아니고 삼단정도로 높은 과일 상자이었던 박스에 겨를 집어넣어 과일이 상처가 나지 않도록 커다란 과일 상자였다. 이렇게 모여진 박스를 약간의 돈을 지불하고 구해와 장롱 깊숙이 들어있던 집안의 사소한 물건들을 담았다.

나무판자 과일 박스에는 유리그릇처럼 깨지기 쉬운 주방용품들을 담았다. 깨지지 않도록 신문지로 싸고, 되도록 많이 들어가도록 기술적으로 포장하는 임무는 대게 어머니들의 손길로 이루어졌다. 집안 곳곳에서 먼지에 찌들어있던 모든 물건들도 그냥 담는 것이 아니라 한번씩 걸레질이라도 하고 담아야 했다.

하루에 끝나는 일이 아니기에 퇴근 후에 온 가족이 모여서 이삿짐을 싼다. 며칠 동안은 늘어놓은 이삿짐으로 제대로 잠잘 공간도 부족했다. 

이삿짐 싸는 것만 문제가 아니라 이삿짐 나르느라 가까운 친지들을 다 불러 모아야 했다. 얼마나 성실히 살아왔는지 드러나는 대목이다.

나무로 된 과일상자는 아버지가 잘 다듬어 주어서 책상이나 집안 물건을 정리하는 사물함 용도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지금 아이들이 생각해보면 웃을 일이였지만 70년대까지는 이웃에서 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지금의 윤택함 속에서 누리고 살고 있는 아이들은 당연한 일이겠지만 어른들의 피나는 노력으로 지금의 윤택함이 있음을 알려주고 싶었다.

노원신문 생활의발견 [414]호에 연재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