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김상순의 생활의 발견

상계동, 1983년. 그 때를 아십니까?

by -한우물 2008. 4. 20.
공업용 미싱 수리점 ‘신성미싱’을 찾아서


세월이 지나면서 우리 주위에 사라져가는 소리와 직업들이 많이 있다. 딱히 기억하려면 생각이 순간적으로 멈춘다. 수년전만 하여도 야심한 밤에 아련히 들려오는 ‘찹쌀떡! 메밀묵!’ 장수의 목소리가 지금은 들을 수 없는 추억이 되었다.

그 중 재봉틀 고쳐주는 아저씨 또한 찾아보려고 해도 찾기가 엄청 힘든 게 현실이다. 예전 같으면 집집마다 바늘이야 필수고, 재봉틀도 흔한 물건이었다. 하지만 요즘 웬만하면 세탁소에서 수선을 해 주기에 재봉틀을 가지고 있는 가정도 없을 것이다.

나도 아버님의 유산으로 유일하게 일본에서 만들었던 ‘싱거’란 재봉틀 몸체만 가지고 있다. 100여년 된 재봉틀인데 도시에서 이사를 다니려니 커다란 덩치가 귀찮아져 다리는 폐기하고 쇳덩어리인 몸체만 보관하고 있다. 

얼마전 취재차 들른 중계4동에서 김용강동장으로부터 우연히 ‘우리 동네에 재봉틀가게가 아직도 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재봉틀이 없어진 요즘도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는 이야기에 선친의 유품 생각도 나서 발품을 들여 찾아가 보았다.

▲ 신성미싱대표 안광용


당현천을 사이에 두고 상계동과 중계동이 나뉘는 그 사이에 자리잡은 ‘신성미싱(대표 안광용)’은 다 허물어져 가는 슬레트 지붕의 벽돌 단층 건물이 택시도 들어오지 않았다던 80년대 노원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그 시절의 상계동은 청계천 평화시장의 60%를 공급하는 하청업체의 결집지였다. 100여평씩되는 대형 공장이 아니라 박중훈이 주연한 영화 ‘우묵배미의 사랑’에 나오는 것처럼 재봉틀 10여대가 요란하게 돌아가는 그런 집들이었다. 그런 집들이 한 300여곳은 되었다. 이웃집의 아낙네들은 단추를 달고, 덜렁대는 실밥을 손질하고, 비닐본투와 박스에 포장하면서 부업이 되었을 것이다.     

안광용씨가 ‘신성미싱’을 차렸던 것도 그 시절이다. 총각 때부터 기계일을 하였던 것이 계기가 되어 의류 하청업체의 재봉틀이 고장날 때면 언제나 달려갔다. 이일에 뛰어든 지가 20여년이 지났다.

평화시장의 의류업이 전성기를 맞으면서 상계동의 의류, 봉제공장도 밤낮없이 돌아갔고, 무리한 일정에, 낡은 재봉틀 또한 수리할 일이 많아 안광용씨의 ‘신성미싱’도 호황을 누렸다. 자식들 다 키워 보내고 나서 IMF를 겪으면서 신성미싱의 풍경도 정물화가 되었다.

작은 가내수공업은 어음이 휴지가 되면서 도산하기 시작했고, 인건비 상승으로 수지타산을 맞출 수 없어서 의류공장들이 다들 중국으로 건너가는 판국에 그나마 안간힘으로 버티던 곳들도 더 이상 일거리가 생기지 않았다. 일거리가 없는데 재봉틀을 고칠 일도 없었다.

아직도 20여 곳에서 봉제일을 하고 있지만 재봉틀 수리점은 이제 겨우 2곳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일주일에 한번도 전화조차 없을 때는 인건비는 고사하고 가게세만 주어야하는 부담감으로 가게를 접고서 새로운 직장을 찾아야 한다는 마음은 굴뚝같다고 하신다.

한창 때는 건강관리를 위하여 항상 등산을 다니곤 했는데 이젠 가게 안을 가득 메운 중고 재봉틀과 함께 명산의 사진들이 가게 안의 어두침침한 분위기에 낡아가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제가 성장하면서 산업구조도 바뀌고, 그에 따라 새로운 직업이 생겨나는 것처럼  어떤 직업은 아련한 추억으로 남을 날도 얼마남지 않은 것 같다. 기억 속에서도 지워질 운명의 ‘신성 미싱’을 찾아서 잠시 그 시절의 기억을 더듬어 보니 한편의 드라마처럼 지나가는 날들이었다.

 

노원신문 41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