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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원신문기사내용

뜨거운열기 김일프로 레슬링

by -한우물 2008. 11. 22.

뜨거운열기 김일프로 레슬링

베이징 올림픽응원열기가 노원 문화의 거리에서도 울려 퍼진다.  한국선수가 금메달을 딸 때마다 베이징 하늘에 애국가가 울려 퍼질 때면 가슴 벅찬 감동이 밀려온다. 세계인의 축제인 올림픽은 국력을 세계에 알리는 날이기에 모든 눈과 귀가 베이징올림픽에 쏠린다, 지금의 국력은 올림픽에서 금 매달을 따는 것으로 국력을 가늠하는 척도가 되어있는 국가의 이미지를 알리는데 커다란 역할을 하기에 국민은 열망하고 손에 땀을 쥐어가면서 시청한다. 한국 최초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주인공 양정모는 1976년 캐나다 몬트리올 올림픽 레슬링 자유형 웰터급에 출전해 금메달을 국민에게 감동을 선사했다. 1936년 손기정이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하고도 일장기를 휘날려야 했던 국민의 설움을 씻은 쾌거였다. 베이징 올림픽 응원 열기를 느끼면서 예전에는 올림픽열기만큼 뜨거웠던 김일 레슬링 선수가 생각난다. 어린 시절에는 흑백TV도 귀했으며 신기하기도 하던 시절에 흑백TV로 드라마나 연속극을 청취하는 것은 어린 시절에는 최고의 구경 거리였다. 지금과 같은 연예인이 스타이던 시절이 아니고 딴따라란 말이 더욱 친숙했던 이야기다.  지금처럼 TV시청도 방안에서 편하게 가족들이 방마다 TV가 있어서 채널 싸움을 하지 않고서 시청하는 것이 아니라 다수가보는 드라마로 통일되어 시청하던 시절 이었다. 당시에 5원정도로 기억되는데 만화방에서  TV이 시청료를 받았고 아니면 만화를 보아야 만화방에서 곁눈질로라도 TV를 시청했다. 일자형 나무의자에 않아서 어린 시절에 최고의 구경거리는 김일 선수가 나오는 프로 레슬링이 최고의 오락이자 스포츠 이었다. 70년대의 국민적 영웅으로 국민의 한 서린 감정을 풀어주는 레슬링계의 거목 김일 선수가 우리 곁에 있었다. 힘들고 어려운 시절에 국민들의 가슴속의 영웅으로 통쾌한 경기를 보면서 가슴에 응어리진 한조차도 풀리는 것 같은 경기였다. 김일 선수의 스승인 역도산은 전쟁직후 밀항자로 일본으로 건너가 자신의 신분을 철저히 속이고 일본인으로 위장하면서 살아가는 역도산은 일본에서 최고의 대우를 받는 레슬링계의 거목이었다, 나는 지금도 아득하게 기억나는 안토니오 이노끼 경기를 기억한다. 같은 스승 밑에서 서로를 너무 잘 알기에 경기는 손에 땀을 쥐게하는 링에서 김일 선수의 포효하는 괴성이 금방이라도 들리는듯했다. 사각의 링에서 일제통치하에서 벗어나 독립된 국가로 성장한지 얼마 안되는 시기였다. 일본인에게는 무조건 이겨야 한다는 강박 관념도 있어서인지 김일 선수의 박치기로 일본선수인 안토니오 이노키 거구를 쓰러트릴 때면 함성이 만화방을 가득 메워다. 예전에는 경기장도 장충 체육관에서 대부분의 경기가 이루어짐은 당시에는 가장 큰 체육관이어서 운동장 좌석을 가득 메운 관중들의 뜨거운 열기와 함성이 터지는 장소였다. 경기 때마다 머리는 빡빡 밀고서 상대편 선수에게 박치기로 응수 할때면 함성이 장충체육관을 밀고 나올 것 같은 통쾌함이 가슴에서 살아 꿈틀거리기도 했다. 어린아이들은 이구동성으로 말을 맞추기라도 한듯 상대선수를 잡을 때마다 박치기 박치기를 연발하면서 같이 링에서 싸우는 선수처럼 즐기고 있었다. 장충 체육관에 입장하지 못한 사람들은 아쉬운 마음으로 발길을 돌리면서 라디오로 박에서 함성소리에 동참하던 어르신을 보았던 기억도 새롭다. 만화방에서 먼저 좋은 자리를 잡으면 경기가 시작되어도 소변이 마려워도 참아야 했었다. 좋은 명당자리를 다른 친구들이 않을까봐 얼마나 긴 시간을 참아야 했는지 모르며 경기가 진행되면 끝날 때 까지는 소변보러 가는 것을  잊어버리기도 했던 기억이 새삼스럽다.


노원신문 4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