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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원신문기사내용

목화 솜이불과 솜틀집

by -한우물 2009. 2. 21.

목화 솜이불과 솜틀집

찬 바람에 얼굴이 시리고, 손발이 꽁꽁 어는 겨울이 깊어가면 동장군이 맹위를 떨친다. 어린시절 동네 골목길은 지금처럼 깨끗하게 포장이 된 곳은 드물어서 진흙길이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하면서 울퉁불퉁했다. 그러다 발걸음에 작은 돌맹이가 발끝에 차이기라도 하면 발이 얼마나 아픈지, 겨울에는 눈물이 쏙 빠졌다. 

지금은 아파트가 보편화되어서 생활하니 웃풍이 없지만 70년대 후반까지 살던 집은 벽돌을 쌓아서 만든 집이라 단열이 안 되었고, 바람이 문틈을 비집고 들어와 겨울철이면 방안에서도 두꺼운 솜이불을 껴안고 내복을 입고 생활했다. 지금은 방안에서 런닝셔츠 바람으로 집안을 돌아다녀도 추운 줄 모르게 따뜻하게 지내기에 예전의 강추위를 상상하는 아이들은 없을 것이다.

고려시대에 문익점이 중국 유학길에 돌아오면서 붓 뚜껑 속에 목화를 몰래 숨겨 들여온 이래로 목화는 우리나라 사람을 따뜻하게 감싸주는 솜문화를 이루었다.

예전에는 어느 가정이나 솜이불 몇 채씩을 장롱에 보관하였다가 겨울이 되면 그 진가를 발휘하던 것이 필수였다. 웃풍이 심한 방안에 열기를 빼앗기지 않도록 두툼한 솜이불을 아랫목에 깔아두고서 냉기를 차단하고, 밖에서 가족이 돌아오면 아랫목을 내어주면서 몸을 녹이도록 배려해 주었다. 그만큼 솜이불의 역할은 우리 일상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혼례를 앞둔 규수집 혼수품 중에는 목화솜으로 만든 이불이 들어 있었다. 누나들이 결혼을 앞두면 솜틀집에서 틀어온 목화솜으로 예단집에서 이불을 맡기거나 집에서 손수 어머니가 이불을 만들어 주시었다. 가장 좋은 목화솜으로 만들어진 혼수품 이불은 신랑신부가 희노애락을 같이하는 보금자리가 되었다. 목화솜은 햇볕이 잘 드는 양지에 널어서 일광소독으로 관리하면 오래 사용할 수 있다. 따뜻하고 위생적인 장점을 가지고 있지만 무거운 것이 단점이다. 그때는 당연하게 생각해 사용해서 불편함 또한 몰랐다.

시간이 지나면 솜이불도 숨이 죽어서 납작하게 된다. 어머니는 이불 호청을 뜯어내고 솜틀집에 맡기어 솜을 틀었다. 솜틀집도 동네마다 성업을 이루었지만 솜을 맡기고 몇일 지나야 찾을 수 있을 정도로 호황을 누리던 시절이 있었다. 솜틀집 아저씨는 하얀 구름같이 풍성한 목화솜으로 깨끗하게 만들어 주신다. 주인아저씨 아주머니는 빠른 손놀림으로 솜틀기계에서 하얗게 부풀어 오른 솜을 긴 나무작대기를 이용하여 차분하게 눌러주면서 수평을 잡듯이 골고루 펼치어 높이를 눈짐작으로 맞추어도 기계로 맞춘 듯 정확했다.

세월이 변하면서 화학섬유로 만든 카시미론 이불의 등장으로 점차적으로 이불시장을 잠식해갔다. 무겁고 비싼 솜이불 대신에 나이론이불은 가볍고 저렴할 뿐만 아니라 가정에서 세탁이 가능해져서 목화솜 이불의 전성시대를 시들하게 만들었다.

지금의 침구용품에 중국산 솜이나 나일론 재질의 솜, 양모, 오리털 이불 등 다양한 종류가 등장했다. 아직도 집 장롱 안에는 30년 전에 어머니가 만들어주신 목화솜 이불이 잘 보관되어 있다. 지나간 기억이 되살려 어머니의 손길이 더욱 그리워지는 솜이불이다. 

노원신문 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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